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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예술은 욕구 배설을 변명하는 도구가 아니다

중앙일보 2018.02.28 01:52 종합 29면 지면보기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문학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문학평론가

1998년 영화 ‘여고괴담’에는 여학생을 추행하는 교사가 등장한다. 많은 관객들이 그 장면에 공감했다. 많게든 적게든 한두 번쯤은 학교에서 그런 방식의 불쾌한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관객들에게 이런 폭력은 일상이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에서 그려진 것처럼 학생을 때리는 교사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큰일 날 일이지만 말이다.
 

습관화된 성폭력 묵인하는 사회
예술가들의 반항적 일탈로 미화
타인의 신체와 영혼 훼손은 범죄
‘미투 페미니즘’ 본질은 휴머니즘

헤겔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식이다. 조선시대엔 반상(班常)차별이나 일부다처(一夫多妻)도 당연했다. 문제는 그런 이데올로기들이 일상에 스밀 때 시작된다. 구조화된 이데올로기는 폭력으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너무 일상화되고 구조화될 때, 폭력은 아예 불편함을 잃고 만다. 최근 한국 사회에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성폭력 문제도 그렇다.
 
‘미투(me too) 운동’으로 본격화된 성폭력 문제는 사실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일상화돼 있다 보니 문제라는 사실 자체가 감지되지 않은 사태에 더 가깝다. 게다가 이 성폭력은 권력형 성폭력이다. 연기자를 성추행한 연출자, 편집자를 추행한 유명 문인, 신인을 농락한 중견들, 신입을 농락하는 고참들. 그들은 모르고 한 게 아니라 그래도 된다고 여겨서, 알고 그래 왔다. 문제 될 게 없었다. 아니 우리는 그런 일쯤은 문제 되지 않는 사회에 살아왔다. 그러니 고은이나 이윤택과 같은 구체적 호명은 시작에 불과하다. 계속 나올 것이다. 문단·연극계·영화계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성폭력이 묵인돼왔기 때문이다.
 
영화 ‘왕의 남자’에는 세도가들의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공길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지금의 형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권력을 가진 양반의 자리에 나름의 일가를 이룬 남성 권력자들이 대신 들어앉아 있을 뿐. 예술의 이름으로 그들이 그토록 부정했던 폭력적 권력자들의 위치에 바로 그들이 있다. 이윤택의 말처럼 아마도 그들은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론

시론

절대 다치지 않을 확신이 있기에 습관화했을 것이다. 어떤 교육부 국장급 간부가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한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대상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피해자는 없었다. 성폭력 피해자가 호소하는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훼손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학적 관점에서 존엄을 잃는 쪽은 바로 가해자이다.
 
예술가라는 호칭 탓에 그들의 폭력은 반항적 욕망이나 예술적 일탈로 옹호되기도 한다. 불경한 변명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일상의 압력을 견디며 작품에 욕망을 쏟아붓는다. 누군가의 신체와 영혼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해소되는 열망이라면 그건 범죄자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통제하지 않은 욕구가 있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은 없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면 더더욱 예술가가 되지 말았어야 한다. 예술은 누설된 욕구를 변명하는 도구가 아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권력형 성폭력이 우리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두려움과 침묵은 멋대로 지지로 오인되고 조장되며 용납됐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부패한 구조의 수혜자로 군림해왔다. 남자와 여자의 대결이 아니다. 이건 우리의 문제이다. 반성이 어렵다면 우선 두려움을 알게 해야 한다. 힘의 벡터를 잘못 선택한 권력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작가인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고통의 감각을 잃은 신체 부위는 이미 우리 몸의 일부가 아니다. 폭력을 휘두르며 타인의 고통에 둔감했다면 이제 그 감각을 배워야만 한다. 더 늦출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미투는 잃어버린 통각을 되살려 우리의 일상을 좀 더 건강하게 만들어 줄 계기가 돼야 한다. 여성을 위한 미투에서 멈추지 않고 모두를 위한 미투여야 하는 이유이다. 성폭력이 파괴하는 것이 존엄성이라면 미투를 통해 회복해야 할 것 역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존중이다.
 
미국 사회운동가인 벨 훅스는 페미니즘을 가리켜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으로 규정했다. 지금 2018년의 미투는 페미니즘을 넘어선 휴머니즘이라고 말해야 옳다. 미투를 통해 관습화된 권력형 성폭력과 착취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위드유(with you)’로 희석시키지도 말자. 뒤로 물러서지 말자. 이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곧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노예나 반상 차별처럼 언젠가 성폭력도 시효가 만료된 아주 오래 묵은 단어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문학평론가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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