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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2월 수상작

중앙일보 2018.02.28 00:40 종합 21면 지면보기
<장원>
홍시
-이상목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천상어귀  
서투른 헤어짐은 없노라 장담하며  
빚쟁이  
스산한 바람 셈을 하는 동짓달  
 
고요를 받쳐드는  
농익은 요염함과  
덜 여문 울음조차 장대에 걸려 있다  
방하착(放下着)  
업보 하나를 내려놓기 위하여  
 
온 생을 불태웠던  
생애의 절정에서  
나누고 비워내는 거룩한 성자처럼  
뜨거운  
상처투성이 화인 하나 새긴다  
 
◆이상목
이상목

이상목

1955년 천안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재 캐나다 거주. 열린시조학회 시조 창작반서 시조공부.

 
 
 
 
 
 

<차상>  
흙수저  
-이소현
 
앓을 때마다 한 번씩  
까만 눈이 내렸다  
감정의 겹들은 어느새 두텁게 쌓여  
한 차례 눈이 내리자  
와르르 무너졌다 
 
어쩌면 나는 이미 한계치에 있었고  
이번에 내린 눈이 모든 것을 무너뜨린 건  
마음에 심어둔 나무가  
뽑혔기 때문이다  
 
아주 크게 앓고 나니 두통이 가셨다  
묵혀둔 눈들은 겨울 내내 녹겠지만  
난 지금 제설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차하>
방문객 –지진 이후
-이희정
 
공양간 난간에 홀로 웅크린 고양이  
얼룩진 눈동자 파고드는 실금 한 올  
엄청난 살의가 다녀간 그날의 증언처럼  
 
막 태어난 새끼들 물었다가 놓았다가  
흔들리는 찌를 건너 허공에 매어둔 목숨  
단 한번, 물리지도 못한 채 사그라진 젖무덤  
 
불안을 견딘다는 건 내력 없는 고통이다  
뒤틀린 주름 사이 햇살은 부서져 꽂히고  
못 지킨, 어미의 슬픔이 쩌억쩍 갈라진다  
 
<이달의 심사평>
이번 달에는 애써 겨울을 견디거나 평창 겨울올림픽에 쏠려서인지 다소 열기가 식었다. 완성작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으나, 해외 투고작에서 눈에 띄는 진전이 있었다.
 
장원에 오른 이상목의 ‘홍시’는 캐나다에서 보내온 작품이다. 하늘에 걸려 있는 “홍시”가 처한 생의 고비를 절정감으로 전복시키면서 “방하착”이라는 초월적 세계로 안내한다. “뜨거운/상처투성이 화인”은 “홍시”에 내포된 의미이자, 묵묵히 생을 견뎌온 내력이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차상으로 이소현의 ‘흙수저’를 올린다. 다른 작품 ‘춤’에서도 나타나는 바, 그의 어법은 젊고 발랄하다. 의미를 겉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전체적인 상황을 통해 제시하는 것도 수준급이다. 다만, 각 장에서 감당해야 할 의미가 심화되지 못한 채 들떠 있는 것이 흠이다. 차하에는 이희정의 ‘방문객’을 올린다. 포항 지진으로 새끼를 잃은 어미 고양이를 통해 인간사의 애환을 겹쳐 보인다. 그러나 제재가 갖는 구체성에 비해 시어 등의 표현 면이 따라주지 못하고 의미가 흩어져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 밖에도 고경자, 조긍, 김학주 등의 작품이 후보작으로 거론되었으나, 1월 심사평에서 언급했던 대로 시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심사위원: 염창권·이종문(대표집필: 염창권)
 
<초대시조>
내 사랑은
-박재삼 
 
한빛 황토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은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구나
 
몸으로, 사내 대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빛에 비춰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박재삼(1933~97)
박재삼

박재삼

일본 도쿄 출생. 고려대 국문과 중퇴. 1955년 등단.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 시집 『춘향이 마음』,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다시 그리움으로』 등. 노산문학상·인촌상 등 수상. 
 
 
 
 

운명적 시인에게서 태생적으로 태어난 시. 그의 수많은 시편 중에서도 서정의 도공이 빚은 명품이요 진품이다. 사랑이란 모든 사람들이 갈구하는 지고지순의 보석이다. 그러나 실제 사랑은 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추상적 재화는 현실세계의 한계와 원초적으로 분출하는 충돌 사이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사랑 역시 한 여인을 그리며 기다리는 일상적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물도록 떨고 있는 가야금 12현은 우리를 유인하는 미로 같은 복선의 배역을 맡고 있다. “내 사랑은”하고 따라 불러보면 왠지 단전 아래서 뜨거운 힘이 모아지는 것을 느낀다.
 
첫수의 탄주가 끝나면 이어지는 둘째 수의 상승 국면은 한층 가파르다. 대상이나 상황 전개의 긴장이 무섭게 전율해 온다. 같은 듯 다른 균형과 대조가 마침내 상승의 원심력을 타고 사립을 빠진 “달빛”에 이르면 “시름 갈래 만 갈래”의 천난만고로 한밤을 꼬박 새운다. 우리 사회의 정서에 “장부”란 “대장부” “헌헌장부”라 하여 사내 중의 사내를 일컫는다. 당연히 더 큰 의지의 초월성이 있을 것이다.
 
아무려면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이 한 여인을 그리는 정한뿐이었을까. “내 사랑”을 구원할 수 있는 목마름으로 시인은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눈물 적셔”준다고 했으니 자유나 말씀 또는 그 이상을 기구해도 좋으리라. 장부의 볼에 대어 “눈물 적셔” 주어야 할 대상이 먼 내일의 이상이라고 가정한다면 이의 뚜렷한 증거로 지상에는 없는 “한 빛 황토재”가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언제나 당대의 현실이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반동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희망은 오늘에 와서도 살붙이는 아니지만 혈맹관계의 공통분모가 있음에 틀림없다. 먼저 밟고 가신 서정의 발걸음이 틀에 붙들리지 않고 성큼성큼 품새까지 넓다.
 
최영효(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 또는 e메일(choi.sohyeo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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