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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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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누가 김영철의 서울 나들이에 꽃길을 깔아주었나

중앙일보 2018.02.28 00:09 종합 24면 지면보기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김영철의 서울 체류는 논란 그 자체였다. 대남도발의 상징인 그를 김정은 당 위원장은 평창 겨울올림픽 폐막식의 북측 대표단장으로 내세웠다. 46송이 꽃다운 장병들을 앗아간 천안함 폭침 도발의 주역이란 국민 비판이 쏟아지자 우리 정부는 “주범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방탄막을 쳤다. 입 한 번 떼는 모습조차 공개되지 않았지만 “북·미 대화 용의를 밝혔다”는 청와대 전언도 나왔다. 하루아침에 ‘평화의 메신저’로 변신한 김영철. 그의 남한 방문 2박3일 여정에서 드러난 문제점과 논란의 불씨는 무엇인지 짚어본다.
 

청와대 습격은 “맹동분자 소행”
박정희 대통령에 사과한 김일성

김영철 환대한 정부 안보부처엔
“천안함 폭침 면죄부 줬다” 비판

한 달 뒤 8주기 맞는 46위 영령
무슨 면목으로 대할지 고뇌해야


“나도 모르게 좌경 맹동분자들에 의해 야기된 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김일성 북한 내각 수상(당시 직책)은 1972년 5월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청와대 습격사태에 대해 사과했다. 1968년 김신조를 비롯한 특수부대원 31명을 내려보내 박 대통령을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경찰과 시민을 살상한 1.21 도발에 대한 유감 표시였다. 치열한 남북 대결을 펼치던 남북한 두 지도자의 경쟁 전선에서 김일성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김일성의 사과는 북한의 도발 행위에 대한 우리 국민의 공분과 박 대통령의 단호한 대응 의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을 목전에 둔 남북 화해 분기기 속에 지난달 1·21사태 50주기 행사는 묻혀버렸다. 청와대 인근까지 진출한 공비들에 맞서다 순직한 고(故) 최규식 경무관 등의 추모행사가 서울 청운동 자하문고개에서 열렸을 뿐이다.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의 ‘노래폭탄’과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의 ‘특사’ 방문은 올림픽 무대의 한켠을 채웠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한 폐막행사엔 김영철이 자리 잡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김영철의 올림픽 무대 등장은 예상된 카드였다. 예술단을 대북제재 대상 선박인 만경봉92호에 태워 보내는 등 북한은 항공과 바닷길, 육로를 모두 열며 제재 무력화를 시도했다. 개막식 참가 고위급 대표단에 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장 등 제재대상 인물을 포함시킨 것도 이런 포석이다. 김영철은 북한이 대북제재를 둘러싼 한·미 공조 무력화와 한국 내 갈등 조성을 위해 써먹을 마지막 카드로 여겨졌다.
 
정부의 대응은 실망스러웠다. 폐막 사흘 전 명단을 통보받자 ‘시간이 빠듯하다’고 둘러댔다. 충분히 예견된 상황인데도 북측 제안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통일부는 설명자료까지 내며 “남북관계 개선과 비핵화 문제를 협의할 책임있는 인물”이란 평가까지 내렸다. 2010년 3월 북한에 의해 자행된 천안함 폭침 도발의 주범으로 지목된 걸 애써 외면한 채 “당시 정찰총국장을 맡고 있었지만, 구체적 관련자를 특정해내는 건 한계가 있다”고 감쌌다. 미국의 김영철 제재도 금융거래와 미국 입국 문제일 뿐 천안함 때문은 아니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국가정보원과 국방부도 여기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싸늘했다. “정부도 고민했다. 대승적이고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이해해 달라”는 당국자의 읍소는 먹히지 않았다. 무리수에 가까운 주장까지 들고 나왔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10월 남북 군사당국 회담에 김영철 당시 정찰총국장이 나온 적이 있다는 점을 들며 “당시 김영철의 천안함 폭침 주범 논란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초점을 잘못 맞춘 주장은 역풍을 맞았다. 남북 간 중립지대로 여겨지는 판문점에서 해상 충돌 문제를 논의한 군사회담에 나오는 것과 ‘평화 올림픽’ 축하사절은 분명히 다르다는 지적이다.
 
안타까운 건 천안함 유족이나 부상 장병들에 대한 정부의 배려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찬바람 부는 통일대교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유족들을 피해 김영철 일행을 우회도로로 따돌리기까지 했다. 문재인 정부가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에게 기울인 정성의 10분의 1이라도 베풀었다면 서운함은 덜했을 수 있다. 통일부는 설명자료에서 “과거 행적이 어떤가에 집중하기보다 실질적 대화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세월호와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태도와 차이가 난다. 세월호 선주·선장 등 가해 세력을 유족들 앞에 보란 듯이 등장시켜 새로운 여객선 출항 축하행사를 떠들썩하게 벌이는 셈이란 비판이 나온 것도 이런 측면에서다.
 
문재인 정부는 이미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놓고 뼈아픈 경험을 했다. 정부 결정에 박수갈채를 기대했지만 거꾸로였다. 한겨레21과 글로벌리서치가 지난 23~25일 실시한 여론조사는 비판여론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단일팀 구성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의견은 74.4%에 달해, ‘비동의’ 25.7%를 크게 앞섰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특히 젊은 층인 2030세대의 반감이 컸다.
 
문제는 이들 세대의 다소 까칠한 대북인식 출발점이 된 게 천안함 폭침도발이란 점이다. 같은 해 11월 연평도 포격도발과 2015년 8월 비무장지대(DMZ)에서 발생한 목함지뢰 사건에 걸쳐 또래 장병들이 무참히 희생되는 걸 지켜본 결과다. 김정은의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 ‘서울 핵 불바다’ 위협을 체험한 세대들은 북한을 ‘세습독재 국가’로 여기며 등을 돌린 지 오래다. 그런데 정부는 도발 총책 김영철에게 면죄부를 줬다. 감수성이 예민한 2030세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김영철은 서울 방문 내내 칙사 대접을 받았다. 국빈 수준의 경호·의전에 특급호텔인 워커힐 스위트룸을 포함해 17층 전체를 썼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서울 사무실을 차린듯한 김영철을 우리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국가정보원장, 통일부 장관 등이 줄줄이 찾았다. 한때 천안함 폭침 도발을 규탄하고 이에 대응한 5·24 대북제재에 공을 들이던 안보 당국자들도 김영철 모시기에 경쟁적으로 나섰다. 카멜레온이 울다 갈 변신 내공이다.
 
혹시 김영철 직함이 통일전선부장이란 점 때문에 그가 ‘통일(unification)’과 남북관계 발전을 담당한다 생각하면 착각이다. 북한 ‘통일전선(united front)’은 노동당의 대남 적화전략을 달성하기 위한 일시적 연합전선 구축을 의미할 뿐이다. 국면 주도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판을 깨버리거나 한·미 대립,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게 북한 통전의 속성이다.
 
이제 한 달 뒤면 천안함 폭침 8주기를 맞는다. 누가 뭐래도 도발 주역일 수밖에 없는 김영철에게 꽃길을 깔아준 안보 당국자들은 무슨 면목으로 젊은 영령들을 대할지 고뇌했으면 한다. 올림픽을 계기로 찾아온 ‘반짝 평화’에는 북한의 진정성이 담기지 못했다. “남조선을 쓸어버려라. 발편잠을 못 자게 하라”는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거친 목소리가 아직 우리 국민 귓전에 쟁쟁한 때문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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