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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 잃은 무액면주식 … 도입 후 6년간 국내기업 발행 0

중앙일보 2018.02.28 00:02 경제 3면 지면보기
미국 기업 주식에는 대부분 액면가가 표시돼 있지 않다. 한국 기업과 달리 무액면주식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미국 애플사 주식. [중앙포토]

미국 기업 주식에는 대부분 액면가가 표시돼 있지 않다. 한국 기업과 달리 무액면주식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미국 애플사 주식. [중앙포토]

한국에서 유통되는 주식에는 대개 액면가가 있다. SK하이닉스는 5000원, 아모레퍼시픽 500원, 넷마블게임즈는 100원이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과는 상관이 없지만, 주식은 자본금만큼 발행하기 때문에 발행주식 수에 액면가를 곱하면 자본금과 액수가 같아진다.
 

MS·애플 등 미국 증시선 활성화
소액투자자들 접근 용이하지만
부실기업 증자에 악용될 우려도

하지만 액면가가 없는 주식도 있다. 가격 대신 지분율만 표시하는 무액면주식이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코스닥에 상장된 일본 기업 SBI핀테크솔루션즈의 주식엔 액면가가 없다. 2012년 12월 3725원에서 시작해 9000원대로 꾸준히 주가가 오른 종목이다. 실적도 좋다. 지난해 4~12월 누적 영업이익(3월 결산법인)이 전년 동기대비 92.6% 증가했다. 일본의 경우 2001년부터 무액면가 제도를 전면 도입했다.
 
애플과 삼성전자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국내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삼성전자가 지난달 50대 1의 액면분할 계획을 발표했다. 액면가 5000원인 주식을 액면가 100원짜리 50개로 쪼개는 것이다. 주식 수가 늘고 주가가 낮아지면 소액투자자도 삼성전자 주식을 사는데 부담이 적고 유동성도 늘어나는 장점이 있다.
 
미국 증시에서 시총 1위인 애플은 무액면주라 액면분할이 아닌 ‘주식분할’을 했다. 애플은 1980년 나스닥 시장에 상장된 이래 총 4차례나 주식분할을 해서 주식 수를 56배로 늘렸다. 애플 주가는 179.05달러(26일 종가)로 소액투자자도 접근이 가능한 ‘국민주’로 자리매김했다. 애플뿐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월마트, 제너럴 일렉트릭(GE), 아마존 등 덩치 큰 미국 주식들도 수차례씩 주식을 쪼갰다. 액면가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분할이 상대적으로 쉬운 덕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액면주는 한번 액면가를 정해 발행하면 원칙적으로 액면가보다 낮은 금액으로 주식을 추가 발행할 수 없다. 액면가보다 낮은 금액으로 주식을 추가 발행하려면 주주총회를 열어 결의하고 법원 인가를 받는 등 절차가 까다롭다. 반면 무액면 주식은 주식 분할이나 병합으로 주가 조절을 쉽게 할 수 있고, 액면가와 관계없이 주식을 추가 발행할 수 있어 기업의 자금조달이 용이하다.
 
한국의 경우 재무관리 편의성을 높이고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2년부터 무액면주식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6년 동안 무액면 상장된 종목은 12개뿐이다. 그나마도 홍콩(9개), 미국(2개), 일본(1개) 등 무액면주식이 활성화된 국가 기업들이다. 코스피 상장사와 국내 기업 가운데 무액면주식을 사용하는 회사는 아직 한 곳도 없다.
 
기존에 액면 주식을 발행한 회사가 무액면주식으로 전환하려면 회사 정관을 고쳐야 한다.
 
정관변경은 주주총회 특별 결의 사안으로 출석한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 이상,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 찬성을 받아야 하는 복잡한 절차다. 또 주식을 분할하거나 병합하기 위해 주주총회를 따로 개최해야 하는 것도 바뀌지 않았다. 장근영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액면주만 사용해온 기업들이 굳이 무액면주라는 낯설고 생소한 제도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증권 유관기관 관계자는 “무액면주를 도입하면 분할, 소각, 감자 절차, 자본금 계산 방법 등 여러 절차를 어떻게 할지 정리가 안 된 상태로 제도만 달랑 들여와서 기업들이 선뜻 다가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한국거래소는 2016년 무액면주식 활성화를 위해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보고서를 만든 이철송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무액면주식의 장점은 주식분할이 쉽다는 것인데 지금 상법에서는 분할 요건, 과정, 절차에 액면주와 무액면주 차이가 없다”라며 “보고서를 만든 2016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일례로 무액면주는 액면가가 없으니 주식분할 때 감자라는 게 있을 수 없지만, 상법은 여전히 액면주에 맞춰서 자본감소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무액면주식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발목을 잡는다. 정윤모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무액면제도에서 가장 혜택을 받는 건 실제로 자본잠식상태에 빠진 한계기업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주가가 발행가를 밑도는 부실기업이 무분별한 증자를 시도하는 등 악용될 우려가 있다. 2014년 무액면주식으로 전환한 차이나하오란은 지난해 8월 223억원 규모의 신규 주식을 발행했다. 당시 현금 및 현금성 자산 900억원을 쌓아두고 전환사채를 갚기 위해 3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발표해 논란을 빚었다.
 
이현·김지아 기자 lee.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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