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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빙상연맹 대신 무릎 꿇은 김보름

중앙일보 2018.02.26 01:45 종합 29면 지면보기
백수진 올림픽취재팀 기자

백수진 올림픽취재팀 기자

“죄송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김보름은 24일 평창올림픽 여자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웃지 못했다. 마치 카메라 너머에 뭔가 두려운 게 있는 것처럼 눈을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관중석을 향해 몇 번이나 무릎을 꿇어 큰절을 올렸다.
 
19일 여자 팀추월 경기가 끝난 뒤 김보름은 줄곧 죄인이었다. 준준결승 탈락의 책임을 팀원 한 명에게 돌리는 듯한 인터뷰 내용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김보름·박지우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자는 내용의 청와대 청원에 동의하는 사람이 25일 현재 60만 명을 넘었다.
 
수십만 명이 ‘국가대표 김보름’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남은 경기에 나섰다. 맨몸으로 관중들 앞에, 그리고 카메라 앞에 다시 섰다.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딴 뒤 관중들 앞에서 사죄의 뜻으로 큰절을 하는 김보름. [중앙포토]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딴 뒤 관중들 앞에서 사죄의 뜻으로 큰절을 하는 김보름. [중앙포토]

그런데 대한빙상경기연맹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노선영의 올림픽 출전을 위태롭게 했던 행정 착오를 시작으로 코치 폭행으로 인한 심석희의 이탈, 임원의 선수촌 방문 논란, 팀추월 대표팀의 ‘왕따’사건에 이르기까지 빙상연맹은 보이지 않았다. 얼음 위 균열은 아물 틈이 없다. 그런데도 대한빙상연맹의 고위 관계자와 임원들은 선수들의 뒤로 숨어있다.
 
한국의 마지막 빙상 경기는 금빛과 은빛으로 마무리됐다. 메달을 딴 선수들은 축하받아야 마땅하지만, 메달이 빙상연맹의 적폐를 덮는 방패가 되어선 안 된다. 김보름이 은메달을 따자 ‘은복절 특사로 석방됐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빙상연맹까지 덩달아 석방해선 안 될 일이다. 청와대 청원에는 빙상연맹에 대한 조사와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수 개인에 대한 마녀사냥은 옳지 않다는 반대 여론도 고개를 든다. 일방적으로 김보름을 향하던 화살은 또 엉뚱한 방향으로 향한다. 이승훈·정재원·김보름의 특혜 의혹을 제기했던 노선영의 과거 인터뷰를 끌어와 ‘김보름 대 노선영’ 구도를 만들고 있다.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많은 메달을 따는 건 반갑고 기쁜 일이다. 그런데 메달 획득이 스포츠맨십과 올림픽정신보다 중요한가. 암 덩이를 잘라내려면 생살을 갈라야 한다. 당장 성적이 나오지 않는 부작용이 생기더라도 뜯어고쳐야 한다. 국민에게 대한빙상연맹의 수술이 필요한지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김보름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자던 60만 명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백수진 올림픽취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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