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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보이’ 손뻗기 마법 … 4강서 0.01초 차로 결승 올랐다

중앙일보 2018.02.26 00:57 종합 15면 지면보기
이상호가 24일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에서 날렵하게 회전하며 내려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상호가 24일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에서 날렵하게 회전하며 내려오고 있다. [연합뉴스]

58년. 한국 설상(雪上)이 겨울올림픽에서 메달권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지난 1960년 스쿼밸리(미국) 올림픽에 임경순(알파인 스키), 김하윤(크로스컨트리)이 참가한 게 도전의 시작이었다. 이후 허승욱, 김형철, 강민혁 등 ‘대한민국 설상 최고수’들이 올림픽 무대에 줄줄이 도전했지만 세계와의 격차는 컸다. 4년 전 소치(러시아) 올림픽에서 프리스타일 스키 모굴에 출전한 최재우가 12위로 마감했을 때 스키 관계자들은 “드디어 10위권 근처까지 왔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상호, 스노보드 평행대회전 은메달

24일 평창 휘닉스 스노우파크에서 한국 설상에 ‘기적’이 일어났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 알파인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 경기에서 ‘배추보이’ 이상호(23·한국체대)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예선 1·2차 합계 1분25초06으로출전선수 32명 중 3위에 오른 뒤 16강 토너먼트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을 줄줄이 꺾고 결승에 올랐다. 올 시즌 월드컵 랭킹 1위 네빈갈마리니(스위스)와 레이스 막판까지 접전을 펼친 끝에 간발의 차로 패해 준우승했다. 올림픽 10위권 진입을 위해 발버둥 치던 한국 설상에 ‘배추보이’가 깜짝 은메달을 선사했다.
 

은 딴 뒤 "꿈일까봐 잠들기 무서워”
 
준결승에서 손을 쭉 뻗는 장면. 스노보드는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신체를 기준으로 삼는다. [TV화면 캡처]

준결승에서 손을 쭉 뻗는 장면. 스노보드는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신체를 기준으로 삼는다. [TV화면 캡처]

4강전 역전승이 백미였다. 이상호는 강한 햇살의 영향으로 눈이 많이 녹아 상대적으로 슬로프 상태가 좋지 않은 블루 코스를 타고도 레드 코스에서 경쟁한 얀코시르(슬로베니아)에 0.01초 차로 앞섰다. 이상호의 플레이트가 코시르의 것보다 살짝 늦게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이상호가 상체를 숙이며 손을 쭉 뻗은 게 역전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스노보드는 스케이트 날 끝으로 기록을 재는 쇼트트랙이나 스피드스케이팅과 달리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신체 부위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상헌 알파인 스노보드 대표팀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코치들과 ‘가운데 손가락을 길쭉하게 늘린 특수 장갑이 필요하지 않을까’ 농담했는데, 그 상황이 현실이 돼 깜짝 놀랐다”면서 “0.01초면 이상호가코시르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앞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상호가 손가락을 늘린 장갑을 쓴 것은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이겼다.
 
이상호는 2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꿈일까 봐 잠들기가 두려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휘닉스 경기장 ‘이상호 슬로프’ 운영

 
25일 강릉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상호가 환하게 웃으며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25일 강릉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상호가 환하게 웃으며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상호의 올 시즌 월드컵 랭킹은 13위다. 월드컵 시즌 최고 성적도 7위권에서 맴돌았다. 메달권과 다소 거리가 멀어보였던 그는 올림픽을 앞두고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수년 간 써오던 부츠와 플레이트를 다른 브랜드 제품으로 바꿨다. 스키협회 관계자는 “미세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스노보드 선수들에게 장비 교체는 모험인데 두 가지를 동시에 바꾸는 도박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상호가 모 아니면 도의 승부에서 ‘잭팟’을 터뜨린 것”이라고 말했다.
 
선수 자신의 결단 이외에 ‘설상 지원군’의 든든한 후원도 큰 힘이 됐다. 이상헌 감독은 과거엔 스키협회 재정이 열악해 운전사, 통역사, 마사지사, 요리사, 왁스 마스터 등 1인 6~7역을 소화했다.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스키협회 재정이 나아졌지만, 예전과 똑같은 열정과 헌신으로 선수들을 챙겼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대표팀에 합류한 ‘메달 청부사’들도 한몫을 했다. 크리스토프 귀나마드(프랑스) 기술 코치, 이반 도브릴라(크로아티아) 왁싱 코치, 프레데릭 시모니(프랑스) 재활 트레이너다. 손재헌 체력 담당 트레이너 등도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이상호의 경기력 완성도를 높였다. 스포츠 심리 분석 전문가 조수경 박사는 선수단 숙소 인근에 상주하며 수시로 심리 상담을 했다. 최은영 마스터키친 대표 셰프는 엄마가 만든 것 같은 집밥으로, 장세인 한의사는 한방 마사지로, 이종석 트레이너는 물리 치료로 도움을 줬다.
 
롯데는 소치올림픽 이후 대한스키협회를 맡아 파격적인 재정 지원으로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롯데는 올림픽 은메달을 목에 건 이상호에게 2억원의 파격적인 포상금도 지급한다. 이상호의 부친 이차원씨는 “상호가 처음 스노보드를 시작한 2000년대 초반 무렵에는 쓸 만한 훈련장을 찾기도 힘들었다. 배추밭에 만든 눈썰매장에서 아들에게 스노보드를 가르치던 기억이 선명하다”면서 “아들을 보며 더 많은 스노보드 유망주가 나오길 바란다. 그래야 스노보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후원사들도 많이 생겨 인프라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라 말했다.
 

스키협회 맡은 롯데 2억 포상금
 
휘닉스 스노우파크는 이상호의 설상 첫 은메달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다음 시즌부터 ‘이상호 슬로프’를 운영한다. 올림픽 경기장으로 리모델링해 이상호가 실제로 경기한 해당 슬로프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아울러 이상호가 올림픽 기간 중 사용한 경기 장비를 기증받아 ‘이상호 전시관’도 운영할 예정이다. ‘평창의 화려한 영광을’을 한국 설상의 유산으로 남겨 보전하기 위한 결정이다.
 
평창=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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