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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불상·불국사에서 찾다 … 찰나와 영겁 사이

중앙일보 2018.02.26 00:29 종합 23면 지면보기
‘경주 불국사 극락전’(122×275cm). 정재규 작가는 친근한 이미지가 인쇄된 이미지를 자르고 오려 포장지와 조각조각 엮는 올짜기 기법으로 새로운 조형을 만들어냈다. [사진 가나아트센터]

‘경주 불국사 극락전’(122×275cm). 정재규 작가는 친근한 이미지가 인쇄된 이미지를 자르고 오려 포장지와 조각조각 엮는 올짜기 기법으로 새로운 조형을 만들어냈다. [사진 가나아트센터]

프랑스 파리에서 작업하던 정재규(69) 작가는 1994년 여름 경주를 찾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머리가 없는 불상 50여 구가 일렬로 늘어선 것을 마주한 때의 일이다. 그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어 불상을 찍기 시작했다.
 

정재규 사진전 ‘일어서는 빛’
원작 오리고, 붙이고, 엮고 …
새로운 ‘조형사진’ 만들어내
세잔·피카소 작품도 재구성
암 투병 중 하루 10시간 작업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셔터 소리와 함께 불상의 참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바로 그때 과거의 한순간과 현재의 순간이 겹쳐지는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죠.” 고요한 박물관 뜰에서 숱한 ‘찰나’가 교차하던 그때 그는 깨달았다. 사진이라는 것이, 아니 사진에 담기는 이미지라는 것이 프레임을 넘어서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서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정재규 작가

정재규 작가

그날 이후로 그는 경주의 불국사 극락전, 대웅전, 석가탑, 다보탑, 돌사자상 등을 사진 찍었다. 그리고 인화한 이미지를 조각조각 자르고 사진 이미지와 포장지를 5~10mm로 잘라 서로 엮은 올짜기 기법으로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정재규 개인전 ‘조형사진, 일어서는 빛’은 그가 이렇게 사진을 소재로 해온 변형하고, 재창조해온 작업을 한눈에 보여주는 자리다. 언뜻 보면 사진전 같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사진전은 또 아니다. 사진을 소재로 만들어낸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자리다. 정 작가는 이 작품들을 ‘조형사진’ 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폴 세잔 예찬’이라는 작품은 세잔의 자화상 그림을 담은 사진을 조각조각 오려내고 포장용 크래프트지와 엮어 짰다. 기존 사진과 크래프트지를 5~10mm 폭으로 오리고 붙이는 그의 손끝에서 여러 겹의 시공간이 촘촘히 다시 엮였다. 여기서 엇갈리고 또 겹치는 것은 세잔의 시간과 인쇄된 사진의 시간, 그리고 작가의 시간이다.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푸른샘)’(140×100cm). 정재규 작가는 친근한 이미지가 인쇄된 이미지를 자르고 오려 포장지와 조각조각 엮는 올짜기 기법으로 새로운 조형을 만들어냈다. [사진 가나아트센터]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푸른샘)’(140×100cm). 정재규 작가는 친근한 이미지가 인쇄된 이미지를 자르고 오려 포장지와 조각조각 엮는 올짜기 기법으로 새로운 조형을 만들어냈다. [사진 가나아트센터]

세잔 외에도 피카소, 마르셀 뒤샹, 만 레이 등 20세기 초 서양 미술사의 한 시기를 흔들었던 작가들의 작품도 그에겐 ‘해체’와 ‘재구성’의 대상이 됐다. 이것은 회화일까, 사진일까? 정 작가는 이를 가리켜 “순수사진은 아니다”며 “사진의 뿌리에서 뻗어난 새로운 가지”라고 답한다.
 
그가 소재로 삼는 사진은 다양하다. 직접 촬영한 사진도 있고, 이미 널리 알려진 작가의 초상이나 작품 사진도 가리지 않는다. 사진 촬영을 왜 모두 직접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인쇄를 거친 사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단다. “폴 세잔의 원화든, 해원 신윤복의 미인도 사진이든 이미 인쇄라는 단계를 거친 것이죠. 제가 하는 이미지 작업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에요. 이미 원화라는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차원으로 접어든 것이죠.”
 
만 레이 예찬’(105.8×76cm). 정재규 작가는 친근한 이미지가 인쇄된 이미지를 자르고 오려 포장지와 조각조각 엮는 올짜기 기법으로 새로운 조형을 만들어냈다. [사진 가나아트센터]

만 레이 예찬’(105.8×76cm). 정재규 작가는 친근한 이미지가 인쇄된 이미지를 자르고 오려 포장지와 조각조각 엮는 올짜기 기법으로 새로운 조형을 만들어냈다. [사진 가나아트센터]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을 지켜봐온 미술비평가 장 루이 푸아트뱅은 정 작가의 이러한 작업이 “모든 물건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누구나 조형작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정 작가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77년 프랑스에 건너가 그곳에서 작업을 해왔다. 프랑스에 도착했을 당시엔 그림을 그렸으나 일찍이 사진의 힘에 매력을 느꼈다. 90년대 들어서는 사진을 통해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사진을 통해 사진을 넘어서는’ 작업에 몰두했다. 2005년부터는 사진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고 아예 화집 속의 복제 이미지 직접 잘라 이를 포장지에 붙이거나 잘라서 엮는 ‘올짜기’ 기법으로 작업해왔다.
 
이번 전시는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프랑스 생활 40년 만에 한국에서 큰 규모로 여는 개인전이라는 점에서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5년 직장암 진단을 받고, 세 번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매달려온 작품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설레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2016년 한 해 동안 작업을 멈추기도 했죠. 하지만 다행히 지난해 3월부터 회복해 하루 10시간씩 작업하며 전시를 준비해 왔어요. 체력이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지만 그래도 작업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평론가 푸아투뱅은 “조형작가 정재규가 하는 일상적인 작업의 핵심은 끝없는 인내”라고 했다. 그는 “작가가 사진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올짜기하며 시각의 변화를 창조하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무한한 시간”이라며 “정 작가는 우리에게 ‘시간의 힘’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을 찾았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간 그는 현재 다시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은 ‘시간의 힘’에 대한 그의 다음 이야기를 벌써 기다리고 있다. 전시는 3월 4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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