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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한 막내' 정재원 "승훈 형이 사이클 사준대요"

중앙일보 2018.02.24 23:10
'빙속황제' 이승훈(30·대한항공)의 금메달에는 막내 정재원(17·동북고)의 희생이 있었다. 
 
이승훈은 24일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 겨울올림픽 남자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7분43초97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 포인트 60점을 얻어 금메달을 땄다. 이로써 이승훈은 평창올림픽부터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매스스타트의 초대 우승자에 등극했다. 
 
 
24일 오후 강원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 결승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승훈이 정재원의 손을 잡고 들어주고 있다.[연합뉴스]

24일 오후 강원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 결승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이승훈이 정재원의 손을 잡고 들어주고 있다.[연합뉴스]

이승훈은 자신의 통산 올림픽 메달 개수를 5개로 늘렸다. 2010년 밴쿠버 대회에서 1만m 금메달과 5000m 은메달, 2014년 소치 대회 팀추월 은메달에 이어 평창올림픽 팀추월 은메달과 매스스타트 금메달까지 총 5개를 가져갔다. 
 
매스스타트는 두 명씩 달려 기록으로 순위를 가리는 여느 스피드스케이팅 종목과 달리, 여러 선수가 동시에 달려 순위를 겨루는 종목이다. 400m 트랙을 16바퀴 돈다. 쇼트트랙(111.12m) 경기를 롱트랙(400m)에서 한다고 보면 된다. 쇼트트랙 선수 출신인 이승훈에겐 안성맞춤인 종목이다. 
 
그러나 혼자 힘껏 노력해도 메달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많다. 매스스타트는 종목 특성상 동료 간의 ‘협력’과 ‘희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개 국가(같은 팀)별로 2명이 출전하면, 한 명이 앞에서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다른 한 명이 그 뒤에서 힘을 비축한다. 그러다가 막판에 뒤에 있던 선수가 치고 나가 골인하는 전략을 쓴다.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선수는 메달을 따기 어렵다. 특히 올림픽에선 더더욱 그렇다. 
 
 
맨앞에서 달리면서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는 정재원. 이승훈(오른쪽 두번째)은 그 뒤에서 체력을 비축하고 있다. [연합뉴스]

맨앞에서 달리면서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는 정재원. 이승훈(오른쪽 두번째)은 그 뒤에서 체력을 비축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승훈은 정재원이 결승에 함께 올라오면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날 레이스 초반에는 빅토르 할트 토루프(덴마크)와 리비오 벵거(스위스) 2명의 선수가 일찌감치 속도를 높여 나머지 그룹과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 다음 그룹에서 정재원이 가장 앞에 서서 달렸다. 정재원은 온몸으로 거센 바람을 막아냈다. 여러 선수들이 정재원의 뒤에 붙었고, 그 중에 이승훈도 있었다. 앞서 달리던 토루프와 벵거는 지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재원 바람막이'를 이용해 체력을 비축한 선수들은 3바퀴를 남기고 스퍼트를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이승훈의 스퍼트가 제일 압도적이었다. 
 
그 때 정재원은 갑자기 허리를 펴고 느리게 가면서 스퍼트하는 선수들을 지켜봤다. 믹스트존(취재공동구역)에 나온 정재원은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승훈 형이 치고 나가는 걸 보면서, '아,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구나'라고 생각해 힘이 빠졌다"고 했다. 
 
 
24일 오후 강원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 준결승 경기에서 이승훈이 환호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24일 오후 강원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 준결승 경기에서 이승훈이 환호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정재원은 이승훈이 가장 먼저 결승선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활짝 웃었다. 그는 "승훈 형이 우승하는 것을 보고 천천히 들어갔다"고 했다. 정재원은 8위를 기록했다. 이승훈은 정재원에게 달려가 꽉 안아줬다. 그리고 태극기 한 쪽을 정재원에게 나눠줬다. 정재원은 "코치 선생님이 다른 태극기를 주셨는데 안 받았다. 승훈 형이 같이 들자고 했다"고 말했다. 
 
오래 전부터 희생 전략을 맞춰온 이승훈과 정재원.  정재원은 "희생이라는 단어보다는 팀 플레이어가 더 맞다"며 "내가 팀추월 종목에서 형들 도움을 진짜 많이 받고 메달을 땄기 때문에 이 종목에서는 제가 팀에 도움을 줄 수 있어 기뻤다"고 말했다. 정재원은 이승훈, 김민석(성남시청)과 함께 이번 대회 팀추월 은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이승훈과 김민석이 맨앞에 서는 바람막이 역할을 거의 반반씩 해줬다.

금메달을 딴 이승훈이 정재원에게 주고 싶은 선물은 없을까. 정재원은 "제가 아직 사이클이 없다. 그래서 승훈 형께 말하긴 했다. 하하. 그래도 승훈 형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이어 "승훈 형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승훈 형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4년 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내 주력 종목인 5000m 시상대에 서고 싶다"고 덧붙였다. 
 
강릉=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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