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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서훈의 실루엣

중앙일보 2018.02.24 01:59 종합 27면 지면보기
강민석 논설위원

강민석 논설위원

대통령 선거일인 2017년 5월 9일. 문재인 당선인의 서울 홍은동 자택을 지킨 단 한 명이 서훈 국정원장이다. 대통령 당선이 유력시되던 순간부터 캠프 사람들 모두가 샴페인을 터뜨렸을 테지만 그는 홍은동으로 달려갔다. 먼저 홍은동 자택의 전화기를 도청이 불가능한 비화기(秘話器)로 바꾸고 보안을 점검했다. 다음 날 아침 군 통수권 행사(이순진 합참의장과의 통화)도 그가 준비했다.
 
자정 넘어 귀가한 문 당선인이 10일 아침에 가장 먼저 얼굴을 본 참모도 그다. 문 당선인이 단잠을 청하는 동안에도 그는 집에 가지 않고 홍은동 자택의 거실에서 밤을 새웠다. 그런 그에게 문 당선인은 “국정원장을 맡아달라”고 통보했다. 10일 오전 9시쯤이라고 한다. 대통령 당선인이 자택에서 직접 지명을 한 유일한 인사가 서훈 원장이다.
 
오른팔, 왼팔 정도가 아니라 막후 그림자 역할을 해온 서훈 원장은 서울대 교육학과 졸업반일 때인 1979년 중앙정보부가 콕 찍어서 스카우트한 인물이다. 처음엔 입사하기 싫어서 스카우트하러 온 중정요원들을 보면 도망 다녔지만 운명인지 29년째 정보맨으로 살고 있다. 정통 정보맨답게 그는 “국민 입장에선 국정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댓글 공작에, 사찰에, 특수활동비 배달사고 같은 것이나 치고 다닌다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
 
그런데 있는 듯 없는 듯해야 할 그의 실루엣이 그만 노출되고 말았다. 미국 정부가 워싱턴포스트(WP)에 펜스 부통령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의 청와대 회동 무산 소식을 흘려주는 바람에 말이다. WP에 따르면 미 행정부 내에서 펜스와 김여정이 만날 수 있게 다리를 놓은 이가 폼페이오 CIA 국장이었고, CIA에 북한이 미국과 대화할 의사가 있다는 정보를 준 쪽이 한국의 국정원이었다.
 
자연스레 의문이 남는다. 국정원이 CIA에 준 정보대로라면, 서훈-폼페이오 라인처럼 남북 간에도 핫라인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과연 서훈 원장의 북쪽 카운터파트는 누구일까.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정답이라고 한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천안함 폭침의 배후로 지목해온, 불바다 운운하며 우리를 위협해온 강성인물과 물밑 대화라인을 구축해야 했고, 협상도 해 나가야 한다니 말이다. 역설도 지독한 역설이지만 피할 수 있는 상황 또한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협상하지 말되, 협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떠오를 뿐이다.
 
강민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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