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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쳐라

중앙일보 2018.02.24 01:57 종합 26면 지면보기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성폭력을 막으려면 말이지. 여성 인권이 어떻고, 평등이 어떻고, 당신 딸자식이 살 세상이 어떻고, 이런 말들 하나도 소용없어. ‘그랬다가는 당신이 일생 쌓아올린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는다’는 말, 그것만이 즉효야.”
 

초등학교 교실서도 심각한 '여혐'
'미투' 위해 페미니즘 교육 시급

번역가 오진영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십여 년 전 한 여자 상사로부터 들었던 말이라며 올린 글이다. 오씨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이 말이 진리인 것 같다”며 “2018년 비로소 대한민국은 성폭력을 저질렀다가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인식이 상식이 되는 단계로 한 발짝 들어섰다”고 썼다. ‘미투’의 유명인 추락 효과다.
 
자고 나면 또 하나씩 새로운 ‘미투’가 나온다. 한때는 민주화의 상징이던 원로시인, ‘문화게릴라’라는 말의 원조이자 현직 대통령과의 친분 때문에 지난 정부 블랙리스트 1호였다는 연출가,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나와 대학생 딸의 안위를 걱정하던 영화배우…. 그간 이들에게 주어진 문화적 영향력과 아우라가 큰 만큼 충격과 배신감은 갑절이다. 특히 단원들을 성적 노예로 삼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연출가 이윤택은 1990년 개봉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극본을 썼다. 강간범 혀를 잘랐다가 과잉방어로 유죄 판결을 받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여성주의 영화다. 파렴치한 이중성이다.
 
사실 국내의 ‘미투’는 처음이 아니다. 2015~2016년 ‘#문화계 성폭력’ 피해 폭로 릴레이,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대 초반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도 있었다. ‘성폭력 100인 위원회’는 당시 대학 총학생회, 노조, 사회운동단체 등에서 벌어진 성폭력 가해자 16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해 가해자의 반론이나 해명을 싣지 않은 것과 ‘진보운동 내 팀킬’이라는 내부 비판을 넘지 못하고 위원회는 해체됐다. ‘#문화계 성폭력’ 릴레이 때는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는 등 2차 피해가 극심했다. 여성계에서는, 해외에서는 폐지 추세인 ‘사실 적시 명예훼손’ 조항이 국내 미투 운동의 발목을 잡은 큰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에 비해 지금 ‘미투’의 파장은 훨씬 크다. “유명 연출가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한두 명 정도? 거의 없다”는 한 연극인의 말을 빌리면, ‘문화계 미투’가 기존의 남성중심적 문화권력을 해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게 미투의 완성은 아니다.
 
한때 소셜미디어에서는 ‘#우리에게는_페미니스트_교사가_필요합니다’라는 운동이 있었다. 교사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사이에서도 ‘김치녀’는 물론이고 ‘앙 기모띠’(일본 성인 동영상에 자주 나오는 기분 좋다는 뜻), ‘느개미·느금마’(상대의 엄마를 비하하는 말) 등 여성혐오적 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때문에 여교사와 남학생, 학생들 간 마찰도 있다”는 글들이 올라온다. 여혐 발언을 쏟아내는 인터넷방송 진행자나 여성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를 전시하는 게임, 수위 높은 야동 등이 어린 남학생들에게 왜곡된 ‘성 인식’을 주입하는 주요 창구임은 잘 알려졌다. 각종 여혐 사이트 이용자 중 상당수가 초등학교 남학생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달 초까지 진행된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에 총 21만3219명이 동의해 정부 답변 대상에 올랐다. 저 끔찍한 성폭력의 고리를 근본적으로 끊어내는 해법이 교육이라는 것은 진부할 정도로 당연한 얘기다. 그저 ‘잘못하면 쪽박찬다’가 아니라 양성과 소수자가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인권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이걸 망설일 이유가 없다. 설마 아직도 또 다른 ‘미투’가 필요한가.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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