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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Picture]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든다

중앙일보 2018.02.24 01:50 종합 25면 지면보기
김환영 논설위원

김환영 논설위원

역설적으로 대부분의 말은 참말이다. 어떤 말을 뒤집어도 참말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도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도 일말의 진리이나 진실을 담고 있다.
 

영어에서 해방되는 ‘봄’ 올 것
‘외투’ 팔 시점은 알 수 없어
북핵, 남북 통일도 마찬가지
아직 ‘겨울’인지 ‘봄’인지 몰라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현재를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으로 유명한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말한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들지는 않는다”도 그렇다. 이 말은 강남 갔다 돌아온 ‘선발대’ 제비를 보고 외투를 팔았다가 얼어 죽은 청년에 대한 이솝 우화를 한마디로 압축한다. 그 청년은 ‘섣부른 예측의 희생자’였다. 하지만 호라티우스의 말을 뒤집어 만든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든다”는 말도 성립할까. 많은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종종 역사를 움직인 것은 단 한명의 걸출한 영웅이나 단 한 건의 의외의 사건이었다.
 
한·영, 영·한 통번역기 제품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일찌감치 영어를 포기한 ‘영포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댓글에서는 “영어 학원들 다 망한다” 혹은 “망해라”는 예측 혹은 저주도 보인다. 그런 ‘성급한’ 사람들이 ‘느긋한’ 사람들보다 성공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도 있다. 하지만 5년이나 10년 같은 가까운 미래에 지금 초·중·고 교육 과정이나 대입 수능에서 영어가 빼버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직은 섣불리 ‘외투’를 팔면 안 된다.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영어를 전혀 공부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영어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될 날이 도래할 것이다. 영어 공부할 시간에 수학이나 과학을 공부하는 게 훨씬 유익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그렇다. 하지만 아직은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들지 않는다”가 당장의 현실에 더 부합하는 것 같다. 사람 수준의 통번역이 언제 완성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10년 후에 될지, 20년 후에 될지, 100년 후에 될지 아니면 지금은 예상치 못한 이유로 영원히 불가능할지…. 솔직히 아무도 모른다.
 
빅피쳐

빅피쳐

‘봄’이 이미 왔건, 한참 후에 오건 알쏭달쏭한 전환기 혹은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모두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여러 가능성 중에서도 확실한 것을 포착하고 실천해야 한다. 확실한 것은 읽기·듣기·말하기·쓰기가 소통과 창의력, 정보 습득의 ‘펀더멘털’이라는 점이다.
 
불행히도 읽기·듣기·말하기·쓰기 하면 영어를 연상하는 게 사실이다. 앞으로는 우리말, 국어로 읽기·듣기·말하기·쓰기를 잘하는 게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AI가 완벽하게 내가 하는 말과 내가 쓴 글을 통번역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품질을 원천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내 말과 내 글이기 때문이다.
 
또 불행히도 국어를 잘하는 것보다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더 인정해주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적어도 대입이나 취업할 때 그런 경향이 있다. 앞으로는 바뀔 것이다. 전환기에는 현실적으로 영어로 통해 국어를, 국어를 통해 영어를 연마하는 ‘전략’도 권장할만하다. 영어와 우리말을 한꺼번에 잡아야 한다. 국어도 영어도 결국 뇌의 사용을 통해 구현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내가 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내가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을 ‘내가 언어를 배우고 있다’는 생각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글의 구성(organization)이나 단락(paragraph), 구두법(punctuation), 주제문(topic sentence)을 다루는 솜씨는 우리말이나 영어나 대동소이하다. 왜 그럴까. 싫건 좋건 영어식 글쓰기가 우리말 글쓰기를 상당 부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비와 봄의 관계’는 북핵 문제나 남북통일 문제에도 시사하는 게 많다. 이번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관계의 숨통이 터졌다고 해서 남북관계나 북한 핵·미사일 개발 문제에 당장 ‘봄’이 온 것은 아니다. ‘봄’은 언젠가 온다 하지만 ‘외투’를 팔면 얼어 죽을 수도 있다.
 
다수 국민이 통일이라는 ‘봄’이 오기를 희망한다고 생각한다. 호라티우스의 말을 뒤집은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든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정말 좋겠다. 영어 학습의 문제에서도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들어’ 우리 초·중·고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영어라는 질곡에서 하루빨리 해방됐으면 좋겠다.
 
이솝 우화의 청년이 외투를 팔지 않았다면 얼어 죽지는 않았겠지만,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는 돈이 없었다. 국가 차원에서 그 청년의 ‘돈’에 해당하는 것은 ‘국력’이다. 국력이 있으면 ‘봄’이 언제 오건 상관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말이건 영어건 ‘언어력’만 있으면 AI가 개막할 어떤 세상이 와도 상관없다.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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