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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주말 골프인사이드] 고진영이 쓰는 LPGA 신데렐라 동화, 해피엔딩 되려면

중앙일보 2018.02.24 00:07 종합 18면 지면보기
꿈의 무대 데뷔전 우승 고진영 
 
고진영이 지난 18일 LPGA 투어 호주여자오픈에서 우승한 후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고진영은 LPGA 사상 67년만에 투어 데뷔전에서 우승한 루키가 됐다. 고진영은 안시현-이지영-홍진주-백규정으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 골프 신데렐라 중 처음으로 LPGA 회원이 되어 우승을 기록했다. [사진 골프 오스트렐리아]

고진영이 지난 18일 LPGA 투어 호주여자오픈에서 우승한 후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고진영은 LPGA 사상 67년만에 투어 데뷔전에서 우승한 루키가 됐다. 고진영은 안시현-이지영-홍진주-백규정으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 골프 신데렐라 중 처음으로 LPGA 회원이 되어 우승을 기록했다. [사진 골프 오스트렐리아]

동화 속 왕자와 결혼한 신데렐라는 행복했을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해피엔딩이었을까.

언어 다르고 텃세 만만찮은 미국
이전 신데렐라들 ‘잔혹 동화’ 많아

“성공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쓴맛 본 서희경 조언에 모험 선택

성적에만 너무 집착 말고 즐기면
10년 뒤에도 후회 않을 결정 될 것

 
현실은 달랐을 거라는 얘기가 많다. 숨 막히는 왕실 의전, 재투성이로 살아온 며느리의 성장 환경을 구박하는 왕비, 공주들의 텃세… 게다가 연예를 안 해 보고 유리 구두 인연 하나로 결혼한 왕자는 알고 보니 난봉꾼에다 성격이 개차반이었을 거라는.
 
골프에도 신데렐라가 있다. 2003년 KLPGA 투어 소속 안시현이 한국에서 열린 LPGA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신데렐라라고 불렸다. 이후 이지영, 홍진주, 백규정이 그 뒤를 이었다. 과거 LPGA 투어는 국내 선수들에게 백마 타고 온 왕자님처럼 꿈의 무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신데렐라에 대한 환상은 줄고 있다. 이젠 LPGA 대회에서 우승해도 미국 투어에 안 가겠다는 선수도 꽤 있다.
 
선수들은 여자 골프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잔혹 동화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LPGA 투어는 힘들다. 언어를 비롯한 환경이 다르며 텃세도 만만치 않다.
 
LPGA는 경쟁은 더 치열한데 비용은 훨씬 많이 든다. LPGA 투어 상금이 더 많긴 하다. 그러나 최상위권이 아니라면 이른바 ‘가성비’가 떨어진다.
 
한국에서 스타로 추앙받아도 미국에 가면 성적을 내기까지 평범한 선수다. “매일 한국에서 TV에 나오던 스타급 선수들은 주목받지 않을 때의 공허함을 견디기 쉽지 않다”는 선수도 있다.
 
한국 선수 전문 캐디 딘 허든은 “프로암, 연습라운드까지 주 6일 일하고 하루 이동인데 공항 검색은 삼엄하고 비행기는 자주 연착한다. 공항 대기실에서 밤 새는 것도 즐길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모처럼 한가한 날엔 특별히 할 여가 활동찾기가 어려워 인터넷을 뒤지다 악플에 기분이 상하기도한다.
 
미국행 골프 신데렐라의 인기가 없어진 가장 큰 이유는 친정집 형편의 변화라고 본다. KLPGA 투어 규모가 커졌다. 국내 투어 정상급 선수들은 적지 않은 수입을 얻는다.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한 미국 투어로 가는 모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15년 전 신데렐라 안시현(왼쪽)과 지난해 LPGA 대회에서 우승한 고진영.

15년 전 신데렐라 안시현(왼쪽)과 지난해 LPGA 대회에서 우승한 고진영.

고진영은 지난해 말 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우승해 미국 진출권을 땄다. 고진영도 고민했다.
 
고진영은 김효주-전인지-박성현에 가렸지만, 꾸준히 뛰어난 성적을 냈다. KLPGA 4년간 99경기를 뛰어 91번 컷을 통과했고(91.9%) 50번 톱 10에 들었다(50.5%). 컷통과율도 매우 높지만 톱 10 진입률이 절반을 넘은 것은 놀랍다. 상금을 쓸어 담았다는 얘기다. 고진영은 총 27억4000만원, 한 경기 평균 3000만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
 
그러나 미국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LPGA에 가면 한국에서만큼 성적을 못 낼 수도 있지만,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서희경 언니의 얘기를 듣고 결정했다”고 했다.
 
조언자가 서희경이라서 의외였다. 서희경은 국내에선 아주 잘했는데 LPGA에 가서는 우승을 못 하고 은퇴했다. 어찌 보면 대표적인 실패 사례 신데렐라였다.
 
서희경과 통화를 했다. 그는 “우승 많이 하는 것도 성공이고 즐겁게 사는 것도 성공이잖아요. 성공이라는 것을 어느 한쪽으로 정의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진영이에게 그런 얘기를 해줬더니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10년 후에도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하겠다면서요”라고 했다.
 
LPGA에서 뛸 때 서희경은 경기 전 퍼팅그린에서 이어폰을 끼고 연습했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선수에 방해받지 않고 연습에 집중하려고 그랬다. 우승하기 위해 악착같았다. 당시 서희경은 여러 가지 종류의 성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랬죠. 우승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나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어요. 미국 가기 전 내가 그런 조언을 들었다면 좀 더 행복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해요.”
 
고진영은 LPGA 데뷔전에서 우승했다. LPGA 사상 67년 만이다. 이보다 더 큰 의미는 한국 여자 골프 신데렐라 중 LPGA 본무대 첫 우승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든다. 성공과 행복의 방향이 다양하다고 생각해서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덜 했을 것이다. 이전 신데렐라들도 고진영처럼 부담을 덜 가졌다면 즐겁게 지내면서 우승도 많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해 본다.
 
고진영의 우승을 축하한다. 이와 함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새로운 버전의 신데렐라 시대가 열리기를 바란다.
 
성호준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S BOX] 평창 컬링 스톤, 스코틀랜드 턴베리 골프장 앞 섬에서 왔다
2015년 스코틀랜드 턴베리 골프장에서 열린 브리티시 여자 오픈에서 박인비가 우승, 고진영이 2등을 했다. 박인비의 커리어 그랜드슬램이 완성된 곳이다. 이 골프장 바로 앞 바다에 주발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섬 아일사 크레이그가 있다. 턴베리의 명물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아일사 크레이그가 보이지 않으면 비가 오는 것이고, 아일사 크레이그가 보이면 곧 비가 올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이 섬을 보기 어려울 정도로 궂은 날이 많다는 얘기다.
 
이 섬은 지구에서 가장 단단한 화강암이며, 최고급 컬링 스톤이 나온다. 10년에 딱 한 번만 채취한다. 평창 올림픽에서 사용된 컬링 스톤도 여기서 왔다.
 
고진영은 “처음 가본 링크스인데다 우승경쟁까지 해서 정신이 없었다. 아일사 크레이그 섬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고진영은 요즘 열심히 올림픽을 보면서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박인비는 2016년 리우 여름올림픽에서 우승했고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했다.
 
2005년 나인브릿지 클래식에서 우승한 2대 신데렐라 이지영의 남편은 현재 평창올림픽 스키점프센터 경기위원장이다. 스키 점프 선수를 영화화한 ‘국가대표’의 실제 모델 김흥수씨로 2015년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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