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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8세기 싹튼 실학은 무엇을 놓쳤나

중앙일보 2018.02.24 00:02 종합 22면 지면보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황태연 지음, 청계

상공업 억제, 신분제 강화 주장
복고적 봉건주의로 흐르기도

“조선은 문명중심 국가 꿈꿨다”
유교의 근대적 측면 새롭게 조명

 
우리나라는 어떤 정치사상을 기반으로 근대화를 성취했을까. 동국대 정외과 황태연(63) 교수가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짧게는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70년 넘게, 길게는 200년 넘게 우리가 허리띠 졸라매고 완수하려고 애써온 시대적 절대 명제가 바로 ‘근대화’였다. 근대화는 어떤 때는 ‘서구화’와 동의어로 쓰인다. 대체로 정치적 자유·평등과 국민국가 건설, 경제적 자본주의화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근대화 개념을 한국사에 적용할 경우에, 내재적 사상 동력으로 흔히 ‘실학(實學)’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개화(開化)사상’ 등이 거론된다. 저자는 기존의 인식을 하나씩 논파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먼저 ‘실학의 신화’를 벗겨냈다. 근대화의 맹아, 자본주의의 씨앗이 18세기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한다고 보는 관점에서, 실학을 그 기반으로 잡는 기존의 통설을 여지없이 비판했다. 성리학(주자학)의 대립항으로 간주되어온 실학의 실상은 ‘성리학의 실용적 변형’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실학자라고 거명되는 이들의 주장은 알고 보면 근대적이기는커녕 복고적 봉건주의 논변이었다고 한다. 화폐·시장·상공업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무너져 내리는 신분제도의 재강화를 추구해 오히려 시대의 흐름에 역행했으며, 토지제도는 사유화 방향이 아닌 태곳적 공유제로 돌아가길 바랐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실학의 지류로 간주되는 북학(北學)이 ‘중국(청나라) 사대주의’를 부추기고 민족문화를 멸시하는 가운데 신분제도 개혁을 외면했다고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실학은 결코 근대화의 정치사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북학과 중국 양무(洋務)운동의 영향으로 생겨난 ‘동도서기론’ 또한 개화와 수구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다가 결국은 개화파와 함께 ‘친일’로 변질됐다고 비판한다.
 
대례복을 입은 고종. 근대화를 추진한 고종은 실학 사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중앙포토]

대례복을 입은 고종. 근대화를 추진한 고종은 실학 사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중앙포토]

실학·동도서기론·친일개화론은 대중의 흐름과 무관한 극소수 지식인들의 사상에 불과했다고 지적한다. 대중을 실제로 움직이고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을 근대화한 한국 특유의 사상 동력으로 저자는 ‘조선중화론(朝鮮中華論)’ ‘신존왕주의(新尊王主義)’ ‘민국(民國)사상’ ‘구본신참론(舊本新參論)’ 4가지를 들었다. 다소 낯선 용어일 수 있지만 한국 사상사의 흐름을 새롭게 살펴보길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조선중화론은 중국과 일본에 맞서 조선을 새로운 중화(문명중심)로 상정하는 독립사상이다. 신존왕주의는 세도가와 외세에 의해 무력화된 조선의 왕을 주변국 임금들과 동등하게 높이는 주권 사상이다. 민국사상은 백성의 탈신분적 자유·평등과 참정을 지향하는 국민국가 이념이며, 구본신참론은 우리 전통을 바탕으로 타국의 앞선 문물을 취사선택하는 중도개혁적 근대화 철학으로 규정된다.
 
황태연 교수

황태연 교수

저자는 유교 문화권에 내재된 ‘유교적 근대화’의 동력을 중시한다. 한국이 전(前)근대적 미개 단계에서 근대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낮은 근대’에서 서양의 영향을 받으며 ‘높은 근대’로 도약했다고 하는 저자의 입론(立論)도 눈여겨볼만한 탁견이다. ‘유교적 근대화론’과 관련해선 저자가 앞서 펴낸 『공자와 세계』(전5권·2011년),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전2권·2014년)을 참고할만하다.
 
이 책은 황태연 교수의 ‘한국 근대사 6부작’의 마침표를 찍는다. 2016년 두 권, 2017년 세 권에 이은 여섯 번째다. 지난해 출판한 책은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이다. 2016년엔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 『조선시대 공공성의 구조변동』을 냈다. 앞선 5권을 통해 저자는 대한제국이 한국 최초의 근대국가임을 다양한 역사 자료를 통해 논증했다. 이번에 나온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은 저자의 전공이 정치사상이란 점에서 시리즈의 본령에 해당한다. 이 얘기를 하려고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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