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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노조가 임금 양보 … 스페인 자동차 일자리 30만개의 비결

중앙일보 2018.02.23 01:11 종합 12면 지면보기
스페인 발렌시아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포드 홈페이지]

스페인 발렌시아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포드 홈페이지]

스페인 동북부 사라고사 인근 오펠 자동차공장에는 근로자 5300명이 일하고 있다. 이 공장의 간접 고용 규모는 부품 업체를 비롯해 수만 명에 달한다. 지난해 이 공장에선 차량 38만2000여대가 생산됐다. GM으로부터 지난해 오펠을 인수한 프랑스 PSA그룹은 이 공장에 대한 추가 투자를 중단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최근 발표했다. 인기 소형차 코르사의 생산도 중단될 수 있다고 했다. PSA그룹 측은 “스페인 비고와 마드리드에 있는 두 공장에 비해 사라고사 공장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근로 시간은 짧으며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라고사 공장의 운영 이익은 2013년 3억8900만 유로(약 5175억2000만원) 적자에서 지난해 34억 유로(약 4조5233억원) 흑자로 바뀐 상태다. 하지만 회사 측은 2020년까지 매년 11억 유로를, 2026년까지 매년 17억 유로를 절감하는 동시에 차량당 생산비용을 700유로씩 줄여야 한다고 노동조합에 알렸다.
 
포드·르노 앞다퉈 스페인 공장 투자 
 
CCOO(근로자위원회)·UGT(근로자동맹) 등 이 공장 근로자들이 속한 노조들은 곧바로 사측과 협상에 들어가 1년 임금 동결에 이어 향후에도 물가상승률의 50~60% 수준에서 임금을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사측의 당초 요구는 3년 임금 동결이었지만 협상 과정에서 절충된 것이다. 사측의 휴일과 야간 근무 수당 10% 삭감 요구는 5% 인하로 타결했다.
 
현지 언론에선 “당초 PSA그룹은 투자를 줄일 계획은 없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가려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CCOO 우나이 소르도 대표는 “회사의 투자를 유지하고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협상에 전념했다”고 말했다. PSA는 이후 차세대 코르사 자동차를 사라고사 공장에서 독점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재정 위기를 겪으며 유럽의 골치거리로 불리던 스페인이 독일에 이어 유럽에서 두번째로 큰 자동차 생산기지로 부상했다. 자국 자동차 브랜드가 없음에도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투자를 끌어들이며 세계 8대 자동차 생산국에 올랐다.
 
9개 브랜드의 17개 대규모 공장이 가동 중인 스페인에서 자동차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0%와 국가 수출액의 19%를 차지한다. 전국적으로 30만명이 종사하고 있고, 간접 일자리도 200만개에 달한다.
 
4년간 생산량 90만대 이상 늘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스페인 자동차 산업이 부활한 것은 노동개혁 덕분이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2010년 사회노동당(PSOE) 정부와 2012년 국민당(PP) 정부가 노동개혁법을 통과시켰다. 전년 대비 3분기 연속 매출이 감소할 경우 해고를 가능하게 하고, 산별 교섭권을 제한해 임금과 근로시간 등을 경제나 회사 경영 여건에 맞게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독일 콘티넨탈AG의 에두아르도 곤잘레스 이사는 “스페인은 특화된 부품공급사와 숙련된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경기 침체를 겪으며 활력을 잃고 고실업에 허덕였다”며 “유연한 노동시장 덕분에 대규모 정리해고를 피하고 자동차라는 성장 동력을 찾게 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말했다.
 
노조의 양보는 자동차 회사들의 투자로 이어졌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자동차 생산량이 90만대 이상 늘어났다. 2015년 독일 폭스바겐이 스페인 북동부 팜플로나 공장에, 다임러가 스페인 북부 빅토리아 공장에 10억 유로 규모의 투자를 늘렸다. 2014년에만 자동차 산업에서 2만6800개 가량의 일자리가 생겨났다.
 
미국 자동차업체 포드도 발렌시아 공장을 유럽 최대 생산기지로 만들기로 하고 2020년까지 23억 유로를 투자하는 계획을 집행 중이다. 벨기에 공장의 문을 닫는 대신 임금이 낮고 고용 유연성이 높은 스페인에 주목한 것이다. 투자가 완료되면 발렌시아 공장은 연간 45만대를 생산해, 포드의 글로벌 생산기지 중 중국 충칭에 이어 두번째가 된다. 2013년 5000명이었던 포드 공장 직원은 9000명으로 늘었다.
 
자국 브랜드 없이 세계 8위 생산국 
 
포드 측은 최근 근로자들에게 새로운 경영 개선안을 받아들이면 쿠가 SUV 차량을 생산하는 설비 투자를 하겠다고 밝혔다. 의료 유급 휴가를 줄이고 야간 근무 때 지급하던 상여금을 동결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노조는 2019~2021년 임금을 0.5~2.5%만 인상하기로 사측과 합의했다.
 
바야돌리드의 르노 공장도 상황이 반전됐다. 2009년만 해도 폐쇄 검토 대상이었던 이 공장은 이제 전 세계 148개 공장 중 생산성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공장 노조도 임금 동결과 함께 생산라인 상황에 따른 전환 근무와 주말수당 감축에 동의했다.
 
“일자리 없으면 근로자 권리도 없다” 
 
사실 노조의 양보가 쉬운 일은 아니다. 십여년 전만해도 스페인에서 신입 직원의 임금을 기존 직원보다 현저히 낮게 책정하거나, 고령 직원의 임금을 깎는 일 등은 상상할 수 없었다. 스페인 자동차 산업의 도약엔 근로자들의 희생이 있다. 전 세계 자동차업계가 경비 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공장 폐쇄나 투자 중단 등을 내세워 근로자들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 성향의 사회주의 노동단체는 “오펠이 코르사 생산 중단 가능성을 내비쳤다가 노조가 양보하자 3주 만에 독점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런 중요한 계획이 급조될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금속노조 연방 사무총장인 마리아노 세레조는 “일자리가 없으면 근로자의 권리도 없어진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에 말했다. “자동차업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장기 근로 협약은 근로자들과 기업 모두에게 이롭다”면서다. 또 그는 “일자리를 유지하고 미래에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우리는 희생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UGT 소속 호세 카를로스 지메노도 “근로자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좋든 싫든 일자리를 지키려면 작은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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