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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나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다"

중앙일보 2018.02.23 00:00
변순용씨가 말하는 나의 아버지 변기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어느 날. 8살 된 어린 소년은 어머니 몸종의 손에 이끌려 화성군청에 들어섰다. 그곳엔 40대 중반의 한 남성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순용이구나. 열심히 건강하게 커라." 

경기 화성 미서훈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사부곡
계몽운동 벌인 변기재 선생 후손 변순용
장안·우정지역 3·1운동 주도 차경규 선생 후손 차진모
송산지역 3·1운동 지도자 홍면옥 선생 후손 故 홍진후
월북·수형 판결문 없다는 이유 등으로 미서훈
당시 희생· 검거된 인원만 화성서 440여명이 넘어
그러나 독립유공자 인정 받은 사람은 겨우 118명
시, 최근「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발간
미서훈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 널리 알리기로

변순용(75)씨가 기억하는 아버지 변기재(1904~미상)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경기도 수원, 오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변기재 선생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사진 화성시]

일제 강점기 당시 경기도 수원, 오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변기재 선생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사진 화성시]

 
변기재 선생은 화성시와 수원시가 분리되기 전인 일제강점기 당시 수원청년동맹 등 각종 사회단체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쓴 인물이다. 오산노동야학원을 세워 한글을 가르치는 등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1932년엔 '공산주의를 선전한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진 못했다. 사회주의 활동과 해방 뒤에 큰아들 2명과 함께 월북한 일이 문제가 됐다.
변기재 선생의 일제 감시대상자 카드 [사진 화성시]

변기재 선생의 일제 감시대상자 카드 [사진 화성시]

 
아들 변순용씨도 아버지를 '월북한 빨갱이'로만 알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월북하실 당시 내 나이가 3살쯤 됐을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8살 때 만났던 그 기억뿐이에요. 당시만 해도 월북한 사람이 있는 집은 '연좌제'라고 해서 전부 고초를 겪었어요. 나도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취직 등에 어려움을 겪었죠. 집에서 아버지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도 몰랐어요."
 
일제 강점기 당시 화성시에서 활동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변기재 선생의 아들 변순용씨. 최모란 기자

일제 강점기 당시 화성시에서 활동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변기재 선생의 아들 변순용씨. 최모란 기자

순용씨가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안 것은 12~13년 전쯤이다. 우연히 친구 집에서 수원지역에서 문화·독립운동을 펼친 인문들의 이야기를 담은 「수원 문화사연구」라는 책을 보게 됐다. 무심코 넘긴 책 속에 아버지의 이름이 있었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먼 친척에게 건네받은 아버지의 사진 속 얼굴은 그와 똑 닮아있었다.
변순용씨는 "무엇보다 내 자손들에게 아버지가 한 일을 바로 알리고 싶었다"며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실까지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 아쉽다"고 말했다.
 
차진모씨가 말하는 나의 아버지 차경규 
"우리 아버지는 훈장이셨어요. 12살에 사서삼경까지 통달해서 동네에서 신동이 났다고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19살 때부터 글방 선생을 했데요. 한 번도 내색을 안 하셔서 어렸을 땐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줄도 몰랐어요."
일제 강점기 당시 경기도 화성시 일대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 차경규 선생. 아명(차봉구)으로 활약하면서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다. [사진 화성시]

일제 강점기 당시 경기도 화성시 일대에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 차경규 선생. 아명(차봉구)으로 활약하면서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다. [사진 화성시]

차진모(79)씨는 아버지 차경규(아명 차봉구·1898~1972) 선생을 이렇게 소개했다. 차경규 선생은 화성시 장안·우정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919년 4월 2일 석포리 주민들과 무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횃불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엔 인근 수촌리·사랑리 주민들과 합세해 장안면사무소를 습격했고 이후 우정면사무소 등을 파괴·방화하고 일본 순사 가와바다를 살해하기도 했다.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된 차경규 선생은 친척들이 살던 충남 당진과 처가가 있던 화성 남양 등에 머물며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 1919년 7월 한 마을 사람의 밀고로 체포됐다. 고문으로 살이 터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상황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진 고문 끝에 생사의 기로에 놓이는 상황이 되자 일본군은 그를 가족에게 넘겼다. 겨우 숨만 붙어 있던 것을 가족들의 정성으로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농사일은 하지 못해 동네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훈장 일을 했다.
"아버지 가슴을 만지면 갈비뼈가 툭 튀어나온 게 만져졌어요. 왜 그런가 했는데 고문 후유증이었던 거죠." 
 
일제 강점기 당시 경기도 화성에서 활동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차경규 선생의 아들 차진모씨. 최모란 기자

일제 강점기 당시 경기도 화성에서 활동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차경규 선생의 아들 차진모씨. 최모란 기자

차진모씨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사실을 중·고교에 다닐 무렵 알았다고 한다. 차경규 선생은 자기 일을 자녀들에게 일절 말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아무리 권해도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거절했다. 
차진모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8년 뒤인 2010년 주변의 권유로 처음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차경규 선생이 당시 '차봉구'라는 아명으로 활동한 탓에 증명해 줄 문서에 모두 '봉구'로 적혀 있어서다. 
또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으려면 재판 관련 기록물이나 행형기록 등 문헌 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차 선생은 재판을 받기도 전에 경찰에서 고문을 받다가 반 시신 상태로 가족에게 인도돼 재판 기록 등이 없었다. 
차진모씨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서훈 신청을 해야 했는데 그게 한"이라고 말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경기 화성시는 이런 변기재·차경규 선생 외에도 미서훈된 독립유공자가 더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화성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본인 순사 2명을 처단했을 정도로 격렬한 독립운동 항쟁지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독립운동 유공자로 추서된 이들은 118명뿐이다.
관련 재판 기록물이나 행형기록 등 문헌 자료가 없다는 이유다.
지난 12일 화성시청에서 열린 간담회 모습. 채인석 화성시장(오른쪽에서 네 번째)이’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구술 자료집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화성시]

지난 12일 화성시청에서 열린 간담회 모습. 채인석 화성시장(오른쪽에서 네 번째)이’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구술 자료집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화성시]

 
대표적인 문헌 자료가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이다. 일제시대 화성시의 행정구역이었던 수원군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을 보면 모두 267건이 확인된다. 인물별로는 126명이다. 일제 감시대상자인 수형자 카드도 화성시와 연관된 인물 카드만 142매다.
문제는 이런 자료가 남아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차경규 선생처럼 경찰에 체포돼 신문과정에서 고문을 받아 사망 직전에 석방된 경우나 사망한 경우 재판 기록이 남을 수 없다. 일본 헌병대의 피해현황 기록에 따르면 1919년 4월 3일부터 4월 15일까지 46명이 희생됐고 2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 경찰에 검거된 인원만 379명이다. 
 
자료가 있어도 변기재 선생처럼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 월북했다는 이유로 미서훈되는 경우도 많다. 
송산지역 3·1운동 지도자였던 홍면옥(1884~미상)선생의 사연도 그렇다. 홍 선생은 1919년 3월 26일 송산면 만세시위와 이틀 뒤 사강장터와 송산면사무소에서 열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일본군 순사가 쏜 총에 어깨를 관통당한 뒤 체포된 그는 일본 경찰이 일본 의사를 불러 치료를 맡기자 거부했다고 한다. 어깨에 구더기가 생길 정도로 악화하자 일본 경찰이 한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했다고 한다. 고문을 받을 때도 신음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기 화성시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홍면옥 선생. 그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다. [사진 화성시]

일제강점기 당시 경기 화성시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홍면옥 선생. 그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다. [사진 화성시]

 
그는 1920년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아 10년의 옥고를 치른 뒤 출옥했다. 이후에도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태극기를 그리도록 했다. 
그러나 해방 후 월북했다는 이유로 미서훈됐다. 
2014년 작고한 홍면옥 선생의 아들 故 홍진후씨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신 건 알지만 월북한 탓에 자랑스러운 마음보다는 원망이 더 커서 어디에도 얘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홍면옥 선생의 아들 故 홍진후씨가 생전에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구술하고 있다. [사진 화성시]

홍면옥 선생의 아들 故 홍진후씨가 생전에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구술하고 있다. [사진 화성시]

이혜영 화성시 학예사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라도 해서 이들의 독립운동 활동이 미미한 것은 절대 아니다"라며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들의 독립운동 가치가 평가절하되어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화성시는 이런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인터뷰해 만든 독립운동 자료집 『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를 최근 발간했다.
경기도 화성시가 미서훈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구술자료를 엮어서 발간한 '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 [사진 화성시]

경기도 화성시가 미서훈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구술자료를 엮어서 발간한 '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 [사진 화성시]

화성시로부터 위탁받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013년부터 3년간 화성지역 미서훈 독립운동가 후손 11명을 인터뷰해 변기재·차경규·홍면옥 선생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들의 사진 등 독립운동 자료 사진도 다수 발굴됐다. 화성시는 앞으로도 미서훈, 또는 서훈 받은 독립운동가들의 자료집을 추가로 발간할 예정이다.
 
채인석 화성시장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노고가 잊히지 않고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그분들의 공훈을 선양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화성=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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