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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58년 개띠 인생샷에서 찾은 희망 뿌리

중앙일보 2018.02.22 01:39 종합 32면 지면보기
정경민 편집국 경제담당

정경민 편집국 경제담당

‘4293년 10월 24일.’
 

빛 바랜 옛 사진에 담긴 치열한 삶
준비 없는 은퇴 풀 밑거름 삼아야

공상과학(SF) 영화 속 먼 미래가 아니다. 빛바랜 옛 사진에 또렷하게 박힌 1960년의 단기 표기다. 지금은 생뚱맞지만 60년 전 사진엔 흔했다. 중앙일보가 신년기획으로 공모한 ‘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 컷’ 시리즈가 되살려낸 기억이다. 흑백사진 속 풍경은 낯설다. 북한이나 중국 오지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초가지붕과 요강단지를 보면 불과 50여년 전 우리 모습이다. 60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였다. 254달러였던 필리핀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초등학교 한 반에 70~80명은 예사였다. “생기는 대로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가족계획 구호가 공익광고에 쓰였던 시절이다. 심지어 예비군 동원훈련 면제를 미끼로 정관수술을 꼬드기기도 했다. 콩나물 겨울 교실은 늘 추웠다. 그나마 조개탄 난로는 호사였다. 그래도 봄·가을 운동회와 소풍은 마을 잔치였다.
 
석유가 나는 것도 아니고 씨만 뿌려도 벼가 저절로 자라는 땅도 아닌 나라에서 흙수저가 붙들 수 있는 한 가닥 동아줄은 교육이었다. 가난 때문에 평생 장애를 안아야 했던 최경순씨(중앙일보 홈페이지 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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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중학교까지밖에 보내주지 않았고 모진 시집살이도 겪었지만 혼자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 됐다. 대학에 입학했던 77년은 유신정권이 파멸로 치닫던 막바지였다. 교문은 늘 닫혀있었다. 대학 생활은 최루탄과 막걸리로 점철됐다. 그 와중에도 징집돼 휴전선을 지키는 경계병으로, 시위를 막는 전투경찰로 고단한 3년을 보낸 58년 개띠도 있었다. 소녀 가장은 반월공단에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여행 가방 두 개 달랑 들고 먼 호주 땅으로 이민을 한 사연도 소개됐다.

 
88올림픽 이후 찾아온 저금리·저물가·저달러라는 ‘3저 호황’ 덕에 적어도 일자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하늘에서 저절로 굴러떨어진 건 아니다. 모래바람에 눈뜨는 것조차 힘들었던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을 견뎠고 거친 파도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외항선도 흔쾌히 올라탔다. 남편은 태백에서 탄을 캐고 아내는 뜨개질 부업으로 태산 같던 빚을 갚아낸 억척스러운 부부도 있었다.
 
겨우 한숨 돌릴 만해졌을 때 얻어맞은 외환위기는 58년 개띠들의 삶에 굵은 주름을 남겼다. 잘 나가던 건축설계사 손웅익씨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고 건강까지 잃었다. 그러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상담사 자격증 부자가 됐다(중앙일보 홈페이지 1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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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빈국에서 태어나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연 주역이건만 은퇴를 앞둔 58년 개띠 앞엔 낯선 도전이 또 기다리고 있다. 준비 없는 은퇴다. 미국·유럽은 2~3대에 걸쳐 진행된 초고령사회를 우리는 한 세대가 가기도 전에 맞닥뜨렸다. 할아버지·아버지로부터 은퇴 노하우를 배울 틈이 없었다. 게다가 내 코만 해도 석 잔데 자식인 에코 세대의 취업난까지 겹쳤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58년 개띠는 이번에도 은퇴 이후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이정표를 세워야 하는 숙명을 안았다. 막막하다.
 
그러나 58년 개띠들이 보내온 인생 샷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확인했다. 58년 개띠는 가난의 무서움을 아는 세대다. 어떤 벽에 부딪혀도 쓰러지지 않는 까닭이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어 자신의 본적이 어딘지조차 가물가물한 송미옥씨(중앙일보 홈페이지 1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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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사꾼에게 시집가 빚더미만 떠안았지만, 맨손으로 두 아이를 대학에 보내 자립시킨 그의 새해 각오 속에 잡초처럼 질긴 희망의 뿌리가 드러난다.
“지금의 삶은 60년의 긴 시간 속에서 함께 한 온갖 시련과 아픔, 기쁘고 행복했던 많은 시간으로 다져진 발자국이다. 다시 시작하는 무술년 새해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사는 날까지 내게 주어진 어떤 삶이라도 겸허하게 끌어안고 또 헤쳐 나갈 것이다.”

 
정경민 편집국 경제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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