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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말아먹을까 좋아하는 국수도 안 먹어요

중앙일보 2018.02.22 00:18 종합 27면 지면보기
대표팀이 지난해 세계선수권 2부리그에서 우승, 1부리그 진출을 확정 짓자 기뻐하는 정 회장. [중앙포토]

대표팀이 지난해 세계선수권 2부리그에서 우승, 1부리그 진출을 확정 짓자 기뻐하는 정 회장. [중앙포토]

“핀란드에 보냈던 아이들이 골을 합작해 너무 기뻐 팔짝팔짝 뛰었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정몽원 회장
핀란드 팀 인수해 선수 유학 보내
원정 땐 선수 물통 챙기며 함께 숙식

21일 강릉에서 만난 정몽원(63) 한라회장 겸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한민국 안진휘가 20일 강원도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남자 예선 플레이오프 대한민국 대 핀란드의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킨 후 기뻐하고 있다. [강릉=뉴스1]

대한민국 안진휘가 20일 강원도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남자 예선 플레이오프 대한민국 대 핀란드의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킨 후 기뻐하고 있다. [강릉=뉴스1]

 
전날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평창올림픽 한국-핀란드의 남자아이스하키 8강진출 결정전. 한국이 1-3으로 뒤진 2피리어드 12분9초, 신상훈(25·상무)의 패스를 받은 안진휘(27·상무)가 골을 터트렸다. 경기장을 찾은 정 회장은 아이처럼 방방 뛰며 기뻐했다.
2014년 핀란드 2부리그에서 뛴 안진휘. [중앙포토]

2014년 핀란드 2부리그에서 뛴 안진휘. [중앙포토]

 
한라그룹은 2013년 핀란드 아이스하키 2부리그 키엔코 완타의 지분 53%를 확보해 운영권을 인수했다. 안진휘와 신상훈을 포함한 한국선수 10여 명이 핀란드로 건너가 꿈을 키웠다. 당시 정 회장이 사재를 털어 체재비와 연봉을 댔다.
20일 오후 강릉시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아이스하키 예선 대한민국 대 핀란드의 경기. 대표팀 라던스키가 핀란드를 상대로 첫골을 뽑아내자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강릉=연합뉴스]

20일 오후 강릉시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아이스하키 예선 대한민국 대 핀란드의 경기. 대표팀 라던스키가 핀란드를 상대로 첫골을 뽑아내자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강릉=연합뉴스]

 
세계 21위 한국은 세계 4위 핀란드에 2-5로 아쉽게 졌다. 한국은 평창올림픽에서 4전 전패, 최하위(1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한국은 ‘빅6’라 불리는 세계 6위 체코(1-2패), 세계 1위 캐나다(0-4패), 세계 4위 핀란드를 상대로 선전했다. 한국아이스하키 등록선수는 2675명(남자선수는 171명)에 불과하지만, 캐나다는 63만1295명이다.
 
1990년대 중반, 한국남자아이스하키 실업팀인 안양 한라는 캐나다 전지훈련에서 낯선 현지팀과 연습경기에서 1-8 대패를 당했다. 알고보니 상대는 캐나다 동네 피자배달원·집배원들이 만든 동호회팀이었다.
 
‘아이스하키에 미친 사람’ 정 회장이 상전벽해를 이뤄냈다. 그는 94년 실업팀 만도 위니아(현 한라)를 창단했고, 97년 외환위기 때도 팀을 지켰다. 2013년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에 취임한 그는 해마다 한라 아이스하키팀에 50~60억원, 협회에 15억원을 출연했다.
 
선수들을 위해 직접 물을 준비하는 정몽원 회장. 서번트리더십을 실천하는 경영자다. [중앙포토]

선수들을 위해 직접 물을 준비하는 정몽원 회장. 서번트리더십을 실천하는 경영자다. [중앙포토]

2008년부터 대표팀 원정경기마다 동행해 선수들이 묵는 3성급 호텔에서 함께 자고, ‘주무’처럼 선수들 물통에 물을 손수 채워넣었다. 대회기간 경기를 말아먹을까봐 면(麵)류를 절대 먹지 않는다. 정 회장은 “소면을 좋아하는데 강릉에서는 꾹 참고 된장찌개를 먹었다. 면을 먹고 팀이 지면 꼭 저 때문에 진 것 같아서…”고 말했다.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유명 블로거 퍽 대디는 2011년 “캐나다가 한국과 맞붙으면 162-0으로 이길 것”이라고 조롱했다. 정 회장은 “걱정 안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162골을 언제 넣나? 넣기도 힘들고 먹기도 힘들다”며 허허 웃었다.
 
정 회장은 “2008년에 세계선수권에 나가면 꼴찌팀이다보니 항상 낡은 라커룸을 받았다. 상대팀이 실력이 떨어진다고 우리 선수들과 악수도 안했다. 얼마나 서럽고 자존심이 상하던지. 스포츠는 외교랑 똑같아서 힘과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백지선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격려하는 정몽원 회장.

백지선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격려하는 정몽원 회장.

한국은 2014년 세계선수권 2부리그에서 5전 전패를 당해 3부리그로 강등됐다. 정 회장의 주도로 2014년부터 북미아이스하키(NHL) 출신 백지선(51·영어명 짐 팩) 감독을 영입하고, 국내에서 뛰던 캐나다·미국 출신 7명을 귀화시켰다. 한국은 지난해 4월 세계선수권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월드챔피언십(1부리그)에 진출했다.
 
정 회장은 “백 감독은 대표팀 명단을 발표할 때 탈락한 선수들을 먼저 불러 위로해준다”면서도“유럽 원정 땐 대사관에서 매운 육개장을 줬는데, 선수들 컨디션에 영향을 준다며 못 먹게할 만큼 엄격한 면도 있다”고 전했다. 정 회장은 “핀란드전 후 백 감독과 다시 시작하자며 껴안고 서로 울었다”고 말했다.
 
16일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러시아-슬로베니아 남자아이스하키 경기를 관전한 정몽원 회장. [강릉=박린 기자]

16일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러시아-슬로베니아 남자아이스하키 경기를 관전한 정몽원 회장. [강릉=박린 기자]

한국은 오는 5월 덴마크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 월드챔피언십에 출전해 캐나다, 핀란드 등과 다시 맞붙는다.
 
한라그룹 창업자인 고(故) 정인영 회장은 ‘꿈을 꾸고, 꿈을 믿고, 그 꿈을 실현하라’란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차남 정몽원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대표팀은 4부리그부터 1부리그까지 올라왔다. 내 이름은 꿈 몽(夢)자에 으뜸 원(元) 자를 쓴다. 꿈꾸는 건 으뜸이다. 세계와의 벽을 느꼈지만 아직 꿈은 끝나지 않았다.” 
 
강릉=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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