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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해 더 생각할래" 공주 혼인 연기로 불붙는 日왕실 승계 논란

중앙일보 2018.02.20 10:35
 
“그의 태양처럼 밝은 미소에 반했어요.”  
“공주는 나를 달처럼 조용히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달달한 이 사랑 고백이 지난 해 가을 일본인들을 흐뭇하게 했습니다. 아키히토(明仁ㆍ85) 일왕의 맏손녀인 마코(眞子ㆍ27) 공주가 도쿄 국제기독교대 1학년 때 만난 대학 동기 고무로 게이(小室圭ㆍ27)와 결혼을 하겠다고 발표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2005년 일왕의 딸 사야코(淸子) 공주의 결혼 이후 오랜만의 왕실 결혼인데다, 대학 시절 만나 사랑을 키워 온 소박한 러브 스토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의 큰손녀 마코 공주(오른쪽)가 대학 동기 회사원 고무로 게이와 결혼을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의 큰손녀 마코 공주(오른쪽)가 대학 동기 회사원 고무로 게이와 결혼을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런데, 올해 2월 초 마코 공주는 돌연 결혼식 연기를 발표합니다. 올해 11월로 예정됐던 결혼식을 2년 후인 2020년으로 미루기로 한 겁니다. 
“가을까지 결혼 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결혼에 대해 좀 더 깊고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천재지변 등의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공주의 결혼이 갑자기 연기되면서, 일본에선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합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키히토 일왕이 2016년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생전에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퇴위식이 2019년 4월로 예정된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왕실의 큰 행사들을 마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식을 올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약혼자 어머니의 빚...가정 문제가 원인?
 
하지만 일본 언론들은 약혼자 고무로 가정의 경제적 상황이 결혼을 연기하는 더 큰 원인이 되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고무로는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지금은 일본의 한 법률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회사원입니다. 안정적으로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집안은 유복한 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간여성’ ‘주간문춘’ 등 일본 주간지들은 지난해 마코 공주의 결혼 발표가 나온 후부터 고무로 모친인 고무로 가요(佳代)의 ‘금전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습니다. 2002년 남편과 사별한 고무로의 모친이 2010년부터 교제했던 남성에게 수년에 걸쳐 400만엔(약 4000만원)을 빌렸다는 것이죠. 이를 아들의 학비나 유학 비용으로 사용했습니다.  
 
2019년 퇴위를 발표한 아키히토 일왕 부부. [AP=연합뉴스]

2019년 퇴위를 발표한 아키히토 일왕 부부. [AP=연합뉴스]

 
상대 남성은 헤어진 후 돈을 갚으라 요구했지만, 고무로의 어머니는 “빌려준 게 아니라 증여로 생각했다”며 변제를 거부했습니다. 이와 함께 고무로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고무로의 어머니가 신흥 종교 신도라는 내용 등 내밀한 가정사가 연이어 보도되면서 공주가 이렇게 ‘복잡한’ 집안과 혼인하는 데 대한 국민들의 불안이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고무로의 모친이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실에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는 보도까지 나왔죠. 일본 왕실을 전문으로 취재하는 저널리스트 치카시게 유키야(近重幸哉)씨는 일본 아메바TV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무로 씨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불거진 문제가 이런 이미지를 해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마코 공주는 이런 문제들을 원만히 해결하고 국민들을 안심시킨 후 결혼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판단한 듯 합니다.” 논란이 가시지 않을 경우, 결혼을 취소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부계 승계만 인정하는 ‘황실전범(皇室典範)’. 여성은 일반인과 결혼하면 왕족 지위 박탈  
 
국민들이 마코 공주의 결혼 이후 생활에 대해 걱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왕가의 규칙·제도 등을 정한 법률인 ‘황실전범(皇室典範)’에 따라 일본 왕실 여성은 일반인 남성과 결혼하면 왕족의 지위를 잃게 됩니다.(남성은 결혼 후에도 왕족 신분이 유지되고, 배우자 역시 왕족이 되죠.) 성을 남편의 성으로 바꿔야 하고, 왕족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받을 수 없습니다. 고무로의 연봉은 200만엔(약 200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도쿄대 종합연구박물관에서 특임연구원으로 일하는 공주의 수입을 더한다 하더라도 윤택한 생활은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일본 궁내청이 2016년 11월 28일 공개한 일본 왕실 단체사진. 아랫줄 가운데 아키히토 일왕 부부 왼쪽으로 아키히토의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 오른쪽으로 차남인 후미히토 왕자 부부가 앉아있다. 윗줄 맨 왼쪽부터 후미히토의 장녀인 마코 공주, 그 옆으로 나루히토의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 그 옆으로 후미히토의 막내 아들인 히사히토 왕자 및 차녀인 가코 공주가 있다. [뉴시스]

일본 궁내청이 2016년 11월 28일 공개한 일본 왕실 단체사진. 아랫줄 가운데 아키히토 일왕 부부 왼쪽으로 아키히토의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 오른쪽으로 차남인 후미히토 왕자 부부가 앉아있다. 윗줄 맨 왼쪽부터 후미히토의 장녀인 마코 공주, 그 옆으로 나루히토의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 그 옆으로 후미히토의 막내 아들인 히사히토 왕자 및 차녀인 가코 공주가 있다. [뉴시스]

 
물론 ‘과거 왕족으로서의 품위 유지’를 위한 돈을 받게 됩니다.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황실경제법에 따라 결혼하는 공주들에게는 왕족 1인에게 배정된 연간 예산의 10배를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일시불로 축하금이 지급됩니다. 마코 공주의 경우 그동안 기준 금액이 연간 1525만엔(약 1억 5000만원)이었으므로, 최대 1억 5250만엔(약 15억원)의 돈을 받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나기 전의 일본 왕실 가족사진.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나기 전의 일본 왕실 가족사진.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불안감은 일본 사회의 해묵은 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바로 ‘여계(女系) 일왕’을 인정하는 문제입니다. 법을 고쳐 왕실의 여성들이 결혼을 해도 왕족의 신분을 유지하며 궁가(宮家·미야케)를 이룰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의 후손에게도 왕위를 물려주자는 것이죠. 앞에서 말했듯 ‘황실전범’은 아버지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은 남성인 ‘남계남자(男系男子)’만 왕위에 오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왕실을 설명할 때 종종 등장하는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말은 일본 왕실이 이렇게 부계 혈통으로만 현재의 125대까지 이어져 왔음을 자랑스러워하는 표현입니다.    
 
40년 넘게 딸만 태어난 왕실...대 끊길 위험 코 앞에 
 
문제는 남계남자의 원칙을 적용할 경우 현재 일본 왕실에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남성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현재 일본 왕족은 총 19명인데, 이 중 14명이 여성입니다. 왕족 남성 5명 중 아키히토 일왕과 그의 유일한 남동생 마사히토(正仁) 친왕은 80대의 고령입니다. 게다가 마사히토 친왕에겐 자녀가 없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의 숙부인 다카히토(崇仁) 친왕(2016년 별세)의 자녀들도 딸만 낳거나 결혼을 하지 않아, 이 집안에도 왕위 계승 후보가 될 남성이 없습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아키히토 일왕의 두 아들인 나루히토(德仁ㆍ58) 왕세자와 후미히토(文仁ㆍ53) 왕자가 현재 왕위 계승 순위 1, 2위입니다. 이 중 큰 아들 나루히토 왕세자에겐 딸 아이코(愛子ㆍ17) 공주가 있고, 후미히토 왕자는 이번에 결혼을 연기한 마코 공주와 가코(佳子ㆍ24) 공주, 그리고 2006년 태어난 히사히토(悠仁) 왕자를 두고 있습니다. 
 
가코 공주에 이어 집안의 미혼 여성들이 모두 결혼을 해 왕적이 사라지면, 왕실에 50대 이하 왕족은 히사히토 왕자 혼자만 남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즉, 현재 12살인 히사히토 왕자에게서 이후 아들이 태어나지 않을 경우, 말 그대로 ‘왕실의 대가 끊기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왕실 대폭 축소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일본에는 여러 분파의 왕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 왕위 승계에 큰 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1946년 왕이 ‘인간선언’을 하면서 1947년 1월 왕실의 축소를 골자로 하는 ‘황실전범’이 제정됩니다. 이 법으로 다이쇼(大正) 일왕 직계 자손을 제외한 11개 분파 51명의 왕족이 신분을 잃고 민간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일부일처제의 도입으로 왕실의 후궁 제도가 폐지되면서 출산 역시 급격하게 줄어들죠.  
 
나루히토 왕세자의 55세 생일 기념해 방송에 출연한 일본 왕세자 가족. [방송캡처]

나루히토 왕세자의 55세 생일 기념해 방송에 출연한 일본 왕세자 가족. [방송캡처]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나기 전인 2000년대 초반,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는 직면한 왕실 승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일왕을 인정하고 여계 자손에게도 왕위를 승계하는 방향의 황실전범 개정을 진지하게 검토했습니다. 여성 일왕, 여계 일왕이 인정되면 나루히토 왕세자의 딸 아이코 공주가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고, 그 자녀가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보수층의 반대 시위가 이어지는 등 찬반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2006년 9월 히사히토 왕자의 탄생으로 논의는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시대에 뒤쳐진 법 바꿔야”..아베 총리는 반대
 
그런데 최근 아키히토 일왕의 조기 퇴위 발표와 마코 공주의 결혼 소식이 나오면서 이번 기회에 시대에 맞지 않는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집권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도 한 방송에서 “여성 존중 시대에 일왕가의 ‘남계남자’ 계승 원칙은 시대에 뒤쳐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중심으로 한 보수 진영은 “만세일계의 전통을 깨서는 안된다”며 굳건하게 반대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일본 궁내청이 공개한 일본 후미히토 왕자의 가족사진.

일본 궁내청이 공개한 일본 후미히토 왕자의 가족사진.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요미우리 신문이 2016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황실전범’을 개정해 여성 일왕을 인정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밝힌 응답자가 72%에 달했습니다. 또 여성 왕족이 결혼 후에도 ‘궁가’를 이뤄 왕족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도 64%가 찬성했죠. 
 
2016년에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일왕의 왕위 계승권을 남자, 남계 왕족에게만 주는 것은 여성 차별”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었다가 일본 정부의 강력한 반발로 채택이 무산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황실전범은) 차별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위원회가 우리 왕실 규정에 대해서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밝혔죠.  
 
시대는 변한 지 오래인데, 일본 왕실은 아직 저 먼 과거에 머물고 있는 형국입니다. 국민 대다수의 평등 의식에도,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는 일본 왕실의 계승 문제, 과연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요. 아키히토 일왕 퇴위를 계기로 왕실 관련 법안을 대폭 손 봐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국회에서 제정한 특별법 형식으로 이 사안을 처리하려는 아베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변화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일본에는 여성 왕이 있었다!
잠깐. 이 기사를 읽고 의문이 드셨을 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역사에는 여성 일왕이 실재했다. 그런데 여자가 왕이 될 수 없다니 무슨 소리인가.  

 
사실입니다. 일본에는 여성이 왕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35대와 37대에 연이어 두 번을 재위한 고교쿠 일왕(皇極天皇, 594~661년·그림)을 포함해 총 8명의 여성 일왕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들이 어린 아들을 대신해 왕위에 오르는 등 임시 재위의 성격이 강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역시 부계로 탄생한, 즉 아버지 쪽이 왕족인 여성들이었죠. 또 이들은 다른 왕족 남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뒤를 이은 왕들 역시 ‘남계 계승’을 이어가게 됩니다.
 
즉 여성 일왕과 여계 일왕 제도는 구분되어 논의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왕족이 극소수에, 왕족끼리의 결혼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두 문제를 분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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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이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