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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만의 무죄, 아버지 대신…'긴급조치 9호' 재심 줄줄이 무죄

중앙일보 2018.02.17 09:00
“아버지가 구속된 후에…. 아버지가 일을 못 하시니 고등학생이던 저는 토요일 일요일에는 남의 집 일을 다녔고 어머니는 보험 일도 하셨습니다.”
 

정권 불평만 해도 징역 '긴급조치 9호'
위헌 결정 후 검찰 직권으로 재심 청구
대부분 사망…'늦은 무죄' 선고 계속

아버지의 무죄 선고를 들으러 나온 노종수(60)씨는 판사 앞에서 43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공부를 곧잘 했던 고등학생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구속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다섯 동생의 고교 졸업을 도왔다. 
 
세월이 더 흐르는 동안 노씨는 어느새 아버지의 죽음까지 겪어낸 환갑이 돼 아버지 대신 법정에 섰다. 아버지에게 실형을 선고했던 ‘서울형사지방법원’은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노씨의 아버지 노용주(1975년 당시 48세)씨는 군청 앞에서 “올해는 잘 살게 해준다고 하더니, 이것이 잘 살게 한 것이냐” “국민들은 기아선상에 있다. 박정희가 백성들을 굶어 죽게 했다. 종합개발계획은 거짓말이다”고 말한 죄로 1년 6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8부(부장 최병철)는 지난달 11일 노씨에 대한 재심을 열고 43년 전의 선고를 '무죄'라고 바로잡았다.
◆ "아버지 구속 후 대학 포기…아쉽지만 원망은 않죠" 43년 늦은 아버지 무죄 받아든 노종수씨 인터뷰
지난달 11일. 서울중앙지법 노종수(60)씨. 문현경 기자

지난달 11일. 서울중앙지법 노종수(60)씨. 문현경 기자

 
노종수씨는 지난달 11일 아버지를 대신해 무죄 선고를 들으러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왔다. '이 사건은 범죄에 해당하지 않아 무죄를 선고합니다. 피고인은 무죄.' 선고가 끝난 뒤 법정 밖에서 노씨를 잠시 만났다.  
 
1975년 당시 아버지가 왜 구속되신 건가.
아버지가 양평군청에 가서 "서민들 힘들게 하느냐, 대통령이 공약을 한 것하고 안 맞지 아느냐"고 얘기를 했다가, 군청에서 경찰서로 바로 연락해서 (아버지를) 잡아갔어요. 그때는 그런 얘기 하면 바로 구속이었죠.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아버지 옛날 '민주당' 당원이었어요. 그때는 야당이었죠. 직업은 별로 내세울 만한 일을 못 했어요. 2년제 대학을 들어갔는데 중퇴를 하셨고, 이렇다 할 직장 없이 생선·소금 같은 걸 어머니와 팔러 다녔고, 김포에서는 장에 가서 그릇을 팔고 그랬어요.

아버지 구속 이후 생활이 어떻게 바뀌었나.
그때 전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매일같이 일을 해야 했어요. 평일엔 학교 끝나면 밭에 가서 일을 했고, 주말엔 남의 집 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숙제할 시간이 없었어요. 선생님이 이런 사정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숙제를 안 내줬어요. 아버지가 동생들은 몰라도 저는 장남이니까 대학을 보내준다고 했었는데 대학도 포기했어요. 제 밑으로 동생이 5명이었거든요.

10대의 어린 마음에 억울함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럴 여력이 없었어요. 살아야 하니까요. 상황이 변하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남들 다 대학 가니까 저도 가고 싶기도 했고, 이후에도 '대학 진학을 했으면 고생은 좀 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봤지만, 아버지를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오늘 무죄 선고 받은 소감은.
재심 청구할 생각은 못 해봤지만, 몇 달 전에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다가 간첩조작 사건으로 처벌됐다가 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을 봤는데, 그 후로는 관심을 가지고 자꾸 인터넷으로 (재심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오늘 직접 나오셨으면 좋았을 테지만 지금까지 사셨으면 94세인데 아마 어려웠을 겁니다. 이제와서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지금의 대통령이 과거의 잘못된 관행들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역사를 올바르게 해준 것 같아 좋습니다.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령을 보도한 1975년 5월 13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일보 DB]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령을 보도한 1975년 5월 13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일보 DB]

 

긴급조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장기독재 토대인 유신헌법에 대해 어떠한 비판이나 반대도 하지 못하도록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총 9차례 발령된 이 조치로 996명이 처벌됐다. 가장 마지막으로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 1호부터 8호까지 내용의 종합이었다.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는 행위’를 처벌해 사실상 정권을 비판하는 모든 표현을 금지했다.  
 
식당에서 낮술 하면서 "박정희 정치, 이승만만 못하다" "우리 평생 대통령 선거 한 번 못해 본다"는 대화를 나눈 손모(1976년 당시 46세)씨는 징역 1년의 실형을, 경리학원 수강생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출마할 때는 한 번만 하고 다시 하지 않겠다고 하고서 세 번씩이나 국민들을 속였다”고 했던 강사 박모(1975년 당시 23세)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드라마 ‘허준’ 등 인기 사극에 출연했던 배우 신국(60·1977년 당시 29세)씨도 “박정희 아들 박지만이 어느 여성 영화배우와 썸씽이 있었다”는 가십성 소문을 동료들과 나눴다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많은 이들이 술을 마시고 한 말 때문에 처벌받았다. 긴급조치가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게 된 이유다. 김모(1975년 당시 52세)씨는 아침부터 술을 마신 뒤 인천역 플랫폼에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박 대통령이 군인을 했으면 얼마나 했느냐.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 봐라. 얼마 안 있으면 인민군이 따발총을 가지고 와서 쏴 죽인다”고 말했다가 1년 6개월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박모(1975년 당시 36세)씨는 늦은 밤 술에 취해 큰길가에서 “김종필이는 김일성의 스파이다. 박정희는 나쁜 놈이며 총살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사복경찰 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고발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주점에서, 다방에서 나눈 사적인 대화가 ‘유언비어 유포’라는 무거운 죄가 돼 법대에 올려졌다. 충북 괴산에서 화전을 경작하던 여모(1975년 당시 40세)씨는 주점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박정희란 놈은 뭣 하는 놈이냐. 우리 화전민만 죽이려고 화전 정리를 한다”고 투덜거렸다가 ‘마치 국가 원수인 박정희 대통령이 화전민을 죽이려고 화전 정리사업을 하는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였다’고 기소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늦깎이 대학생으로 학생회 활동을 하던 양모(1976년 당시 41세)씨는 “인권을 탄압하는 유신헌법·긴급조치 등 악법은 개정돼야 한다. 시민 불복종 운동을 하자"는 글을 써 타자학원 학생에게 타자를 쳐 달라고 부탁했다가 그 학생의 신고로 학원에서 검거됐다.
 
◆"박정희, 이승만만 못해" 징역1년, "박정희, 김일성과 똑같아"는 2년…그 시절 '9호 계산법'
[출처=검찰의 재심청구로 무죄선고된 각 재심 판결문. 문현경 기자]

[출처=검찰의 재심청구로 무죄선고된 각 재심 판결문. 문현경 기자]

 
 
 
 

故 김대중 전 대통령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사진은 1978년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김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故 김대중 전 대통령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사진은 1978년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김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지난 6일 법무부·검찰 과거사 위원회는 검찰 수사에서 인권 침해 및 권한남용이 있었는지 살펴봐야 할 12가지 개별 사건과 2가지 포괄 사건을 1차 사전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은 포괄적으로 조사해야 하는 사건으로 꼽혔다. 
 
1975년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에야 풀렸다. 민주화 이후 이에 대해 재판을 다시 해달라는 재심 청구가 줄을 이었고, 2013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위헌 결정과 판결로 부당함이 확인됐다. 
 
하지만 여전히 재심을 받지 못한 이들이 있어 지난해 10월 검찰이 나섰다. 대검찰청 공안부는 “긴급조치 9호로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145명에 대해 검사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한다”고 했다. 죄가 아닌 것이 죄가 되던 시절, 평범한 사람들을 피고인으로 법정에 세웠던 검찰이 스스로 그 조치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바로잡아달라고 나선 것이다. 
본인이 직접 재심 청구를 하지 못한 이들은 상당수가 이미 사망한 이들이었다. 이달 초까지 23명이 늦은 무죄 선고를 받았고 이 중 18명은 이미 망자가 됐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해야 하는 무죄 선고는 계속되고 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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