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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계의 일자리를 빼앗는 컴퓨터? - 김진호의 음악과 삶

중앙일보 2018.02.17 00:02
기계가 인간을 대체해온 역사는 길다. 더불어 기계에 대한 인간의 파괴적 대응의 역사도 있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기계들을 파괴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음악가들도 이런 처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미리 말하자면 이 글은 19세기의 노동자들처럼 기계를 파괴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지는 않다.


음악과 과학의 경계는 사라졌다. 오늘날 소리 합성 악기인 신디사이저 기능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삶에 들어왔다. / 사진:YAMAHA 제공

음악과 과학의 경계는 사라졌다. 오늘날 소리 합성 악기인 신디사이저 기능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삶에 들어왔다. / 사진:YAMAHA 제공

2000년 이후 우리는 ‘의미 있는 고용 창출 효과가 동반되지 않는 경제성장’이라는 현상을 알게 된다. 이 현상은 산업현장에서 자동화된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해오면서 특히 가속화됐다.
 
포브스 독자들은 1994년 상영된 영화 [파리넬리]라고 혹 본적이나 들은 적이 있는지. 1728년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배경으로, 거세된 남자인 카스트라토가 여성적이지만 온전히 여성적이지만은 않은 목소리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부른다. 특히 여성들이 감동하는데, 주인공 파리넬리는 안타깝게도 그녀들 중 누구도 유혹할 수 없다. 여성들을 유혹하는 이는 가난을 이유로 파리넬리를 거세하게 한 파리넬리의 형이었다.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흘러간다.
 
많은 노래들이 이 영화에서 불리는데,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게오르크 헨델의 [울게 하소서]는 특히 아름답다. 영화 속 카스트라토에 의해 연주되는 장면만큼은 인상 깊고, 그 노래의 아름다움과 함께 천상으로부터 내려온 것 같은 가수의 목소리에 감탄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 낸 음향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 노랫소리가 컴퓨터라는 기계를 통해 만들어졌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컴퓨터가 이미 오래전에 사람의 목소리, 그것도 특이한 가수의 음색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는 놀라운 이야기다.
 
영화 '파리넬리'의 목소리, 기계음이었다고?
영화 [파리넬리]의 한 장면.

영화 [파리넬리]의 한 장면.

카스트라토(castrato)는 ‘거세하다’의 영어인 ‘castrate’와 관련이 있는 단어다. 중세 유럽, 변성기 이전에 거세되어 여성적인 목소리를 내는 가수인 카스트라토가 많이 활동했었다. 중세 교회가 여성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지만 막상 여성을 무대 위에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했기 때문이란다. 1789년 7월, 분노한 프랑스의 민중들은 구체제를 무너뜨린다. 민중들 중 일부는 가톨릭교회를 파괴했고, 특히 많은 오르간을 파괴했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그들이 타도한 성직자 계층의 악기였기 때문이다. 많은 혁명적 조치들이 발표되었고, 카스트라토 폐지 역시 이런 조치들 중 하나였다. 거세시키면서 노래를 하게 한 중세적 조치가 혁명가들에게는 야만적인 구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때문에 프랑스는 이후 19세기 동안 카스트라토가 거의 없게 된다. 반면 프랑스를 포위했던 보수적 제국들에서는 여전히 카스트라토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와 근대화의 길을 밟은 유럽에서 카스트라토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와중에 20세기 초의 마지막 카스트라토는 운 좋게 자신의 노랫소리를 녹음했다.
 
마지막 카스트라토의 이 음반을 입수한 프랑스의 전자음악연구소 일캄(IRCAM)의 연구원들은 [파리넬리] 영화 제작자의 주문을 받아 음반 속 카스트라토의 소리를 1990년대 전자적으로 재현해냈다. 피아노와 같은 악기 소리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소리는 이미 1950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분석될 수 있었고, 컴퓨터와 같은 전자적 도구를 통한 분석 결과로 사람들은 소리의 내적 구성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인간의 육체를 현미경으로 볼 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포를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어떤 한 소리의 (은유적 의미에서의) 세포를 ‘배음’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소리들은 엄청 많은 배음들로 구성되어 있다. 배음 각각을 전기적으로 생성하고 전기적 신호들을 합치면 애초 분석 대상이었던 한 소리의 등가물이 만들어진다. 이 작업을 소리 합성(sound synthesis)이라고 부른다. 소리 합성을 통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컴퓨터와 같은 전기적·전자적 수단을 통해 재현될 수 있게 된다. 앞서 소개했던 [파리넬리]의 아리아도 이런 방식을 통해 만들어졌다.
 
1950년대의 연구자들을 비롯해 1990년대의 일캄(IRCAM)의 연구원들은 과학자이자 음악가였다. 연주자 없이 음악을 컴퓨터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그들을 새로운 유형의 연주자로도 볼 수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렇듯 이미 1950년대에 음악과 컴퓨터공학이 본격적으로 만났다. 그 결과 상술한 소리 합성이라는 음악적·과학적·정보공학적 기술이 발전했고, 이후 신디사이저라는 전자악기의 원천 기술이 된다. 신디사이저(synthesizer)의 가장 흔한 형태는 대중 음악가들이 가지고 다니며 그 건반을 눌러 소리를 내는, 대체로 피아노보다 작은 악기다. 전자기타나 전자베이스, 전자피아노 같은 악기도 신디사이저의 일종이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태국 대표 스키선수로 출전하려 했다가 성적 조작 사건으로 출전이 금지된 바네사 메이는 홍콩 출신 영국의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다. 한때 물속에 들어가 물에 젖은 옷을 입은 채 선정적인 몸매를 과시하며 전자바이올린을 연주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들고 다녔던 전자바이올린도 일종의 신디사이저였다. 신디사이저가 세계 악기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바이올린과 같은 어쿠스틱 악기 시장의 규모를 앞질렀다. 더 놀라운 것은 신디사이저가 이런 형태 말고도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삶에 알게 모르게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데스크 탑 컴퓨터에 내장된 사운드 카드도 신디사이저 기능을 지원한다. 휴대전화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초소형 신디사이저 칩이 휴대전화에 내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기계 음악, 일자리 줄여
 
오늘날 우리가 TV나 영화에서 배경음악이나 음향을 들을 때, 대중가요 반주를 들을 때, 그 소리가 진짜 바이올린인지 아니면 신디사이저의 것인지 구분하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정확한 통계는 확보되지 않았는데 일상에서 듣는 소리의 약 90% 이상이 컴퓨터를 통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연주자가 필요 없는 과학적 기술에 기반을 둔 음악을 이미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고, 이 때문에 연주자들의 연주 기회는 엄청 줄었는데, 대다수는 이러한 현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쏟아져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 대중가요, 게임, CF 등의 음악은 예전 같았으면 연주자들의 일거리일 수 있었다.(전국에는 음악대학이 꽤 많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음악은 많아져도 음악을 수행할 사람들의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관현악단이라는 전통적 일자리가 여전히 남아 있긴 하다. 쏟아져 나오는 음대생들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히 여유로운 영역은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 클래식의 입지가 그리 안정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면 일자리를 빼앗긴 음대생들은 거리로 나와 “컴퓨터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하거나,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창의적인 음악적 행위들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창의성은, 혹은 창의성의 기반인 사물들의, 사고 영역들의 연결성이 우리 사회에서 교육되고 있기는 한가. (스티브 잡스에 따르면 창의성은 단지 사물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다. 문과 계통 학과를 나온 젊은 대학생들이 취직을 하지 못하거나, 취직은 했는데 기업에서 직면한 기술·과학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양해를 구하며 쓰는 표현이 있다. “문송합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최근 한 방송사의 토론회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던 유시민 작가가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등 기술적 이야기에 대해 듣고는 “문송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토론을 지켜본 일부 네티즌들은 한국의 이과 엘리트들이 ‘이송’하다고 말해야 한다며, 또 다른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네티즌들에 따르면 한국의 많은 이과 졸업생들과 이과 엘리트들이 기술적 이야기는 잘하지만, 기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문제나 국가가 그 기술을 제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어쩌면 문과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들이 “이송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따지면 음악, 나아가 예술을 하는 필자는 “음송” 혹은 “예송하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음악가라서, 예술가라서 죄송하다고, 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을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키워내지 못하는 교수라서 죄송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예술가들은 세상에 대해 초연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예술적 초연함이 혹 예술가 보편적 모습이 아니라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모습은 아닐까. 소리 합성이라는 융합적 연구 분야는 음악과 과학이 만나는 여러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음악은 이미 오래전에 과학 및 기술과 관련돼 있었다. 우리네 삶과도 밀접하다. 이제는 교육이 나서야 하는 건 아닐까. 더 이상 문송, 이송, 예송, 음송하다는 이야기가 젊은이들 입에서 회자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진호 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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