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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 위해 쌀 공수, 배탈에 날아간 첫 메달···첫 동계올림픽 이야기

중앙일보 2018.02.17 00:01
무엇이든 처음은 애틋하다. 그 처음이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이라면 더더욱. 평창 동계올림픽을 맞아 대한민국 대표로 처음 동계올림픽에 나섰던 옛 선수들을 수소문해봤다. 평창의 빙판 위를 질주하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어떤 마음일까, 궁금해서다. 그렇게 고(故) 이효창 선수의 아내 하상남(92) 씨와 조윤식(87) 선수를 만났다. 이 선수는 광복 이후 최초로 1948년 스위스 동계올림픽에 출전했고, 조 선수는 한국 전쟁 후 처음으로 이탈리아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다. 이들의 인터뷰와 국가기록원 사진을 바탕으로,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전한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동계올림픽 선배들이 말하는 '그때 그 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동계 올림픽에 출전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저인 이화장으로 초대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동계 올림픽에 출전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저인 이화장으로 초대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이효창 선수는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 5회 동계올림픽에 문동성ㆍ이종국 선수와 함께 참가했다. 대한민국 선수들이 최초로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한 기록이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최용진 감독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종국 선수가 기수를 맡았다.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동계올림픽에서 태극기를 앞세운 우리 국가대표팀이 입장하고 있다. 글씨는 당시 최용진 감독의 것이다. 최 감독은 "처음보는 태극기, 역원 3명, 선수 3명, 이러한 극소수의 우리 진용을 보고 관중은 동정과 특기한 표정으로 격려하는 듯"이라고 기록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동계올림픽에서 태극기를 앞세운 우리 국가대표팀이 입장하고 있다. 글씨는 당시 최용진 감독의 것이다. 최 감독은 "처음보는 태극기, 역원 3명, 선수 3명, 이러한 극소수의 우리 진용을 보고 관중은 동정과 특기한 표정으로 격려하는 듯"이라고 기록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밥심과 스위스의 눈물  
당시 고려대 2학년 재학 중이던 이효창 선수는 올림픽 참가에 앞서 미국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당시 한국팀 단장은 스위스 유일의 한국인이있던 이한호(당시 65세) 박사가 맡았다. 스위스에 도착한 선수들은 이 단장에게 “쌀밥을 먹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이 단장은 스위스 정부의 도움을 얻어 이탈리아에서 쌀을 공수해줬다. 이효창 선수는 올림픽 경기 일주일 전 열린 친선경기에서 5000m와 1만m 경기 우승을 차지해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정작 올림픽 땐 갑작스레 배탈이 나 자신의 주 종목 경기를 기권해야 했다.
 
개막 후 3일째 되던 날, 한국 대표팀에 또 한 번 비보가 날아들었다. 문동성 선수가 노르웨이 선수와 부딪혀 피범벅이 된 것이다. 문 선수의 부상으로 당시 37세였던 최 감독이 대신 500m 경기에 출전했다.  
 

노르웨이의 태극기
올림픽 폐막식 전날, 우리 국가대표팀은 노르웨이로부터 오슬로에서 열리는 노르웨이 선수권 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우리나라와 미국 등 8개국이 참가하는 국제대회였다. "코리아(KOREA)의 혼을 발휘하고 싶다"던 이효창 선수는 1500m 경기에서 1위와 1.2초 차이로 2위에 올랐다. 노르웨이 황실은 당시 시상식 직후 우리나라와의 친선식을 열었다. 이 선수는 이튿날 열린 5000m 경기에서도 3위에 올랐다. 귀국한 이 선수는 이후 발명가로 변신했고 2006년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스위스 동계올림픽에서 우리 대표팀과 노르웨이 대표팀이 찍은 사진. 노르웨이는 이때 우리 대표팀에게 오슬로에서 열리는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달라고 초청했다. 오슬로 대회에서 이효창 선수는 1500m 경기에서 2위에 오르며 설욕을 한다.[사진 국가기록원]

스위스 동계올림픽에서 우리 대표팀과 노르웨이 대표팀이 찍은 사진. 노르웨이는 이때 우리 대표팀에게 오슬로에서 열리는 선수권 대회에 참가해달라고 초청했다. 오슬로 대회에서 이효창 선수는 1500m 경기에서 2위에 오르며 설욕을 한다.[사진 국가기록원]

 
아내 하상남 씨의 평창 응원
스케이트 원로 고 이효창 선수의 부인 하상남 여사가 12일 서울 서빙고로 자택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스케이트 원로 고 이효창 선수의 부인 하상남 여사가 12일 서울 서빙고로 자택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이효창 선수는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비싼 스케이트 화를 두 켤레나 갖고 있을 정도였어요. 그때는 한강 물이 얼면 스케이트를 탔대요. 지금처럼 잘 닦여진 경기장이 없었을 때니까. 개성 송도고보(松都高普) 시절 일본 빙상계로 진출했는데, 1만m를 17분 55초로 달려서 당시 일본 신기록을 세웠어요.  1500m, 5000m 종목이 주특기였죠. 일본빙상선수권 대회(1945년)에서도 우승할 만큼 실력이 발군이었죠. 한데 ‘그때 나는 조선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고 합디다."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을 빠짐없이 집에서 봤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더라고요. 우리 어린 선수들이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자랑스러워요. 선배들은 세계 대한민국을 알려야 한다는 응어리를 가슴에 안고 달렸지요. 지금 선수들은 그런 무거운 짐 내려놓고, 혼을 다해 달려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강릉 쇼트트랙 경기장의 백발 선수
 
한국전쟁으로 1952년 동계올림픽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1956년 이탈리아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윤식 선수.변선구 기자

한국전쟁으로 1952년 동계올림픽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1956년 이탈리아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윤식 선수.변선구 기자

 
조윤식 선수는 일찌감치 17일 강릉행 고속버스표를 예매해뒀다. 거동이 불편하지만, 쇼트트랙 후배들 경기를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서다.  
 
우리의 두 번째 동계올림픽
 
그는 우리나라 쇼트트랙 빙상 선수단 창설에 기여한 인물로 꼽힌다. 경희대와 동국대, 단국대 빙상부 감독을 지냈다. 앞서 한국전쟁 이후인 1956년 이탈리아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대한민국의 두 번째 동계올림픽 출전이었다.
 
한국 전쟁의 여파로 선수복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이탈리아 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때 우리 선수들이 입은 옷은 미군의 군복이었다. 오른쪽 두번째가 조윤식 선수.[사진 국가기록원]

한국 전쟁의 여파로 선수복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이탈리아 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때 우리 선수들이 입은 옷은 미군의 군복이었다. 오른쪽 두번째가 조윤식 선수.[사진 국가기록원]

 
조윤식 선수는 만주벌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야구심판인 부친 저점용 씨를 따라 창춘(長春)에서 자랐다. 긴 겨울 공원에 얼음판이 생기면 스케이트를 탔다. 해방된 뒤 가족과 한국으로 돌아왔고, 빙상부가 있는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50년 1월. 춘천에서 열린 전국선수권대회에 출전해, 500m 1위를  차지했다. 이튿날 5000m 경기도 있었지만, 얼음이 녹아 경기가 취소됐다.  
 
한강에서 열린 빙상대회. 강이 꽁꽁 얼어야 시합을 할 수 있었다. 연습은 '얼음을 쫓아다니면서' 했다. 경기장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 국가기록원]

한강에서 열린 빙상대회. 강이 꽁꽁 얼어야 시합을 할 수 있었다. 연습은 '얼음을 쫓아다니면서' 했다. 경기장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 국가기록원]

 
그해 6ㆍ25 전쟁이 터졌다. 헌병학교에 들어가 17년을 헌병으로 살았다. 헌병이 되고서도 빙상은 계속했다. 군의 사기를 높이겠다며 빙상부가 만들어진 턱이다.  
 
한탄강에서 육군 빙상부 시절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조윤식, 평창남, 장영 선수. 조 선수는 1953년 핀란드 헬싱키 세계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군의 사기 함양을 위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출전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한탄강에서 육군 빙상부 시절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조윤식, 평창남, 장영 선수. 조 선수는 1953년 핀란드 헬싱키 세계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군의 사기 함양을 위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출전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1953년 핀란드 헬싱키 세계선수권 대회를 마치고 돌아올 때 일본을 경유했다. 도쿄를 경유하며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의 초대를 받았다.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간 영친왕은 한국 선수들을 자택으로 불러 격려했다. 조 선수는 당시 영친왕의 모습에 대해 ”한국말을 잘하지 못해 짧게 대답만 했지만, 기품있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가운데). 도쿄를 경유하는 한국 빙상 선수들을 자택으로 불러 격려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가운데). 도쿄를 경유하는 한국 빙상 선수들을 자택으로 불러 격려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미군 장교 코트를 선수단복으로
전쟁이 끝난 뒤, 조 선수는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대한민국 대표로 올림픽에 나서는 것이 뛸 듯이 기뻤지만, 대표팀의 형편은 좋지 않았다. 돈이 없어 미군 장교 코트를 단복으로 입었고, 간신히 모자만 사서 썼다.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항공사인 대한국민항공사(KNA)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쿄로 간 뒤, 비행기를 갈아타고 이탈리아로 갔다.  
 
제7회 이탈리아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의 경기를 관전하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제7회 이탈리아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의 경기를 관전하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현지 호텔에선 빵과 우유, 달걀을 아침으로 줬다. 이걸 먹고는 경기를 뛸 수 없다는 생각에 주방에 따로 부탁해 끼니마다 스파게티를 먹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호텔을 떠나는데 주방장이 농담을 했다. “경기 기간 한국 선수들이 먹은 스파게티 면을 이어붙이면 한국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이탈리아 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서 사용했던 조윤식 선수의 스케이트. [사진 국가기록원]

이탈리아 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서 사용했던 조윤식 선수의 스케이트. [사진 국가기록원]



쇼트트랙의 시작
조 선수는 아들이 스케이트 화를 신기 시작하면서 은퇴했다. 아들이 스케이트를 타는데 아버지가 선수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감독으로 전향한 그는 훈련을 독하게 시킨다고 ‘조악질’로 불렸다. 당시 쇼트트랙 빙상 팀이 만들어지게 된 데에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 일본 빙상연맹이 쇼트트랙 경기 영상을 가져와 보여주며 한국도 팀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렇게 1983년 일본 시나가와현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 처음 출전했다. 당시 남자 선수 한명과 여자 선수 한명이 경기를 뛰었는데, 쇼트트랙 전용 스케이트 화가 없어 인도어용 스케이트를 사 신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으니 선수들이 코너를 돌다가 넘어졌다.
 
이후 1985년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 대비해 다시 팀이 만들어졌지만, 비인기 종목이라 하겠다는 선수가 많지 않았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김기훈 선수가 남자 1000m 개인전과 5000m 계주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땄다.  
 

 
조윤식 선수의 평창응원
 
"평생 승부를 보는 운동을 해왔지만,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에요. ‘시합은 연습같이, 연습은 시합같이 하라’는 거. 승부는 다른 게 아닙니다. 자기 의지, 결단력, 기술이 승부의 요인이거든요. 덮어놓고 이기겠다고 생각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겠다는 강한 의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신이 승부지요. 스포츠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고 하는 것이 이겁니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게 도전이고, 올림픽 정신 아니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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