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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폭우 멎고 서광 비춘 순간 태어난 나

중앙일보 2018.02.16 15:00
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 컷(43) 최광신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돌 무렵 외갓집 툇마루에서 찍은 사진이다. 불안해하시면서 서 계신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희미하게 보인다. 우람한 모습으로 주의에서는 장군감이라고 칭찬이 자자했었단다. 
 
내가 태어나던 날(음 7월 3일), 줄기차게 장맛비가 내렸다 한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산통에 출장 가신 아버님 급거 귀갓길에 오르셨다. 읍내서부터 교통편 없는 20리 비포장 신작로를 폭우를 무릅쓰고 뜀박질로 동네 어귀에 다다르니 어찌 된 일인가. 장대 같던 빗줄기는 간데없고 갑자기 우리 집 지붕 위로 찬란한 햇빛이 내리쬔다. 뭔가 서광과 함께 길한 기운이 도는 게 아닌가. 
 
뱃속에 태아는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의 도착과 함께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엄마 뱃속을 박차고 나오니 우람한 팔다리 멀쩡하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갓난애 엉덩이에 커다란 점이 보이는 게 아닌가. 아, 갑자기 폭우가 멈추고 지붕 위로 내리쬐던 햇살, 그리고 엉덩이의 커다란 점까지. 필시 이 아이는 신동임이 틀림없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1965년 청라초등학교에 다닐 때 옥수수빵과 가루우유를 먹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다니던 시절이다. 선생님 댁 아들로 남들의 이목을 받던 어느 일요일 비포장 신작로를 엉금엉금 지나던 연탄 실은 트럭은 우리의 놀잇감이었다. 
 
트럭 뒤에 매달려 램프를 깼으니 다음날 조회시간 교단의 교장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일요일 트럭의 램프를 깬 사람 나와'라는 불호령에 평소 정직한 사람이 되라는 엄하신 아버지의 가르침에 나는 당당하게 조회대열의 맨 앞으로 나갔다. 아뿔싸! 아버지도 맨 앞에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서 계셨으니 앞으로 나오는 나를 보고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그러나 아버지 운명하시는 날까지 그 사건을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가슴속에 묻어 두셨다. 아버님의 참모습, 내게 정직을 가르쳐 주신 남자 아버지. 개구쟁이로 자랐지만, 머리는 명석했나 보다. 1968년 12월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은 그래도 반에서 가장 먼저 외웠으니 말이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대표로 청소년수련원입소 신고식을 하고 있다. 오른쪽이 나인데 특이하게 반바지 차림이다. 중학생 때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우수상 수상)으로 졸업하고, 1971년 마을에 새로 창립한 청라중학교에 입학했다. 교장 선생님의 대외활동 권장 방침에 따라 청소년수련대회 등 학교대표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시는 작은 아버지께서 내려오셔 나의 영어 실력을 시험해 보시고는 아버지께 서울전학을 권유하셨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했던가. 한적한 시골학교 학생의 영어 실력이 뭐 있겠나 싶지만 어쩌다 서울유학길에 올랐다. 
 
동대문구의 전농중학교로 전학 갔다. 사실 그때가 난생처음 서울구경이었으니 촌놈이 정말 어리벙벙할 수밖에. 급우들은 나를 촌놈으로 따돌리려 했으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은 나에게 혼도 났다.
 
고등학교 때 헌인릉으로 소풍을 갔다. 왼쪽에 목총이 보인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는 사람이 나다. 고교 입학을 앞둔 1974년 고교입시에 새로운 제도가 생겨났다. 이름하여 뺑뺑이. 
 
내가 살던 동대문구는 2학군으로 다른 1, 3, 4학군에 비해 우수한 학교가 많았지만 나는 속칭 일류학교가 많은 공동학군으로 지원했다. 나는 서울시 5대 공립고 성동고등학교(다른 공립고에서는 자기들이 5대라 주장)에 입학, 자부심이 많았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나라는 혼란스러웠으니 날마다 일본대사관 앞 반일시위로 오후를 보냈다. 
 
반공교육에 열을 올리던 위정자들은 호국정신을 강요하며 목총 메고 소풍 가던 시절 어수선한 정국에 덩달아 나도 향학열이 식었다. 예비고사 성적이 엉망이었으니. 대학진학에 낙방하고 재수길로 접어들었다.
 
1978년 대학교 1학년 때 캠핑을 떠났다. 오랜 우정으로 중학교 시절 청소년수련대회 생활을 함께한 친구들과 전라남도 홍도 정상에 올랐다. 가장 오른쪽이 나다. 재수 시절 예비고사 중상위권이었지만 한 번 재수한 몸으로 다시 한 번의 낙방은 정말 큰 일이다. 소신 지원으로 집 근처에 있는 경희대학교에 합격했다. 
 
이때부터 정국은 최루탄가스로 자욱했으니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 나는 교문 앞에서 가스탄 터질 때마다 화장실로 도망갔으니 유명을 달리하신 민주열사들께 면목이 없다. 
 
그 시절 모든 대학생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수와 같았으니 2학년 마치고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막 끝난 6월 17일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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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더오래 더오래팀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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