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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세상을 바꾸는 1%’는 한낱 꿈일까

중앙일보 2018.02.13 01:44 종합 28면 지면보기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1%의 인류가 나머지 99%를 다 합친 것보다 재산이 더 많다. 그 1%는 지난해에도 전 세계에서 발생한 부(富)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그런데 문제의 1%가 조세회피처에 재산을 꼭꼭 숨기며 빼돌리는 세금이 줄잡아 수백 조 원에 달한다!’
 

지구촌 수퍼 리치 총출동한 다보스에 쏟아진 쓴소리
빌 게이츠처럼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 깨달았길

지구촌 수퍼 리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다보스 포럼(공식 명칭은 ‘세계경제포럼’) 개막에 딱 맞춰 지난달 말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이 발표한 보고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헌신하자’는 훈훈한 구호 아래 해마다 어김없이 뭉치는 이들 최상위 부유층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한 방 먹인 격이랄까. 사실 4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포럼은 ‘부자들만의 잔치’라는 비아냥에서 벗어나고자 그간 꾸준히 변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올해만 해도 3000여 명의 참가자 중 3분의 1은 각국 정치인과 국제기구 수장, 시민단체와 노조 대표, 기술 및 문화 분야 혁신가들까지 각계각층 인사들로 채워졌다.
 
그럼에도 태생의 한계 탓인지 ‘다보스 포럼’ 하면 여전히 끼리끼리 돈 자랑하는 사교모임 정도로 치부되기 일쑤다. 회의장 밖의 과격한 시위만 회자할 뿐 정작 포럼 내용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게 매년 반복되는 풍경이다. 올해 역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감히 여길 왜 오느냐”는 항의 시위와 함께 자화자찬으로 도배된 그의 폐막 연설이 소소한 뉴스거리가 된 게 고작이다. 마침 기자란 직업 덕분에 99%의 일원임에도 이번 포럼에 초대됐던 내 입장에선 입과 손이 근질거릴 수밖에 없다. 포럼 회의장의 꽁꽁 닫힌 문 안에서 실제로 어떤 얘기가 오가는지 직접 보고 듣고 왔으니 말이다.
 
미리 자백부터 하자면 나의 첫 다보스 체험기가 전체 그림을 보여주긴 어려울 터다. 부지런을 떨었는데도 겹치는 일정이 많아 나흘간 열린 400여 개의 행사 중 불과 25개쯤 참관했을 따름이니 말이다. 그래도 올해 포럼을 관통한 핵심 키워드를 하나만 꼽자면 바로 불평등이다. 이 글 첫머리에 언급한 옥스팜의 위니 비아니마 사무총장도 한 회의에 직접 참석해 “기업들의 막대한 세금 탈루 탓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시달리고 빈곤을 탈출할 기회를 빼앗긴다”며 불평등 악화의 주범으로 탈세를 콕 집어 비판했다.
 
4차 산업혁명 역시 빈부 격차를 더 벌리는 악재가 될 거란 예측이 쏟아졌다.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불안정한 일자리를 떠도는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위험 계층, 이른바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가이 스탠딩 런던대 교수는 “인공 지능과 로봇에 떠밀려 늘어날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보호 대책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특별 연설에 나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이런 목소리에 각각 힘을 보탰다. “기업인들에겐 기술 혁신이 신나는 도전이겠지만, 이 자리에 올 수 없는 평범한 이들에겐 일자리에 대한 위협이다” “가장 많은 혜택을 본 거대 IT 기업들이 노동자 재교육과 불평등 해소에 기여해야 마땅하다”
 
흡사 포럼의 주인공들 면전에서 손님들이 앞다퉈 쓴소리를 쏟아낸 모양새다. 그래 봤자 쇠귀에 경 읽기 아니겠냐고? 하긴 기업인들로선 다보스 포럼 회의장 안쪽의 좀 더 내밀한 공간에서 비공개로 벌어지는 돈거래에 훨씬 관심이 쏠렸을 게다. 공개된 자리에서 펼쳐지는 숱한 고담준론은 그저 남들 눈을 의식한 구색 맞추기 정도로 여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니 의미 없다”보다는 “그래도 의미 있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꼭 10년 전 다보스 포럼에서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가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10억명을 돕자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외친 뒤 자선사업가로 변신했던 걸 기억하는지. 그를 뒤따르는 이가 다만 한둘이라도 나온다면 세상은 꽤 많이 달라질 테니 말이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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