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양에선 최진희 '사랑의 미로' 가사에 자주·평화 등장

중앙일보 2018.02.09 15:18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이 8일 강릉아트센터에서 펼친 첫 공연에 남한 가요가 대거 등장해 화제다. 전통 민요와 클래식, 관현악 연주 등 비교적 다양한 레퍼터리 속에 북한 예술단은 이선희의 ‘J에게’,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등의 노래를 선보였다. 
 

삼지연악단이 선보인 남한 가요
북한에선 주민들에게 이미 익숙
김정일의 간부 비밀파티 애창곡
일반 주민은 단속 피해 탈북도

철저하게 폐쇄된 북한 체제에서, 그것도 남한 방문 공연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는 건 언뜻보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주민들 사이에 한국의 대중가요가 꽤 오래전부터 다양한 경로로 유입돼 애창되고 있다는 게 고위 탈북 인사들의 전언이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첫 공연이 8일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열렸다. 한복차림으로 공연을 펼치는 삼지연관현악단  강릉=권욱기자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첫 공연이 8일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열렸다. 한복차림으로 공연을 펼치는 삼지연관현악단 강릉=권욱기자

 
한국 가요뿐 아니라 외국 음악 반입이 철저히 통제된 북한 체제지만 1980년대∼90년대 초반 중국 연변을 통하여 북한에 흘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연변가요’·‘대남방송 노래’라는 이름으로 북한 주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간 대표적인 노래가 ‘사랑의 미로’, ‘동백아가씨’, ‘아침이슬’, ‘님과 함께’ 등이다.

 
김정일의 애창곡이기도 한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는 평양 주민들 너 나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한 탈북 인사는 “김정일이 측근들이 모인 비밀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연형묵 총리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연형묵이 ‘사랑의 미로’를 불러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김정일의 각별한 관심 속에 연형묵은 경제난이 닥쳐 굶주린 노동자들이 공장 기계부속을 마구 훔쳐내던 ‘고난의 행군’시기 군수공장들이 밀집된 자강도의 도당 책임비서로 파견됐다. 김정일은 “연형묵이 우리의 군수공업을 지켰다”며 1998년 그에게 ‘노력영웅’칭호를 수여했다. 연형묵이 자강도 군수공장들을 지키면서 ‘사랑의 미로’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의 미로’는 북한 체제의 특성에 맞춰 개사돼 불리기도 했다.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사랑은 알 수 없어요"라는 도입부는 같지만 이후부터는 "자주위해 평화를 위해/목숨 바친 그댈 못 잊어/그대 작은 가슴에/빛을 준 사랑이여/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사랑의 미로여~”라는 가사로 불렸다.
전통 민요·해외클래식 관현악 연주 등 다양한 공연을 펼치는 가운데 북한예술단은 한국의 여러 대중가요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부르고 있는 삼지연관현악단 [중앙포토]

전통 민요·해외클래식 관현악 연주 등 다양한 공연을 펼치는 가운데 북한예술단은 한국의 여러 대중가요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부르고 있는 삼지연관현악단 [중앙포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도 북한 대학생이 많이 부른 베스트 애창곡 중의 하나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탈북 인사는 “북에 있을 땐 ‘아침이슬’이 한국 노래인줄 몰랐다”며 “대학 친구들이 항거정신이 묻어나는 이 노래를 ‘구국의 소리방송’ 등을 통해 나가는 대남방송 노래로 알고 즐겨 불렀다”고 말했다. ‘아침이슬’은 화면노래 반주곡으로 만들어져 식당과 함께 운영되는 북한 노래방을 점령하기도 했다.  
 
한국 노래는 북한 영화 등 공식 매체를 통해서도 확산됐다. 대표적인 게 ‘그 때 그 사람’이란 노래다. 이 가요는 김정일의 지시로 1992년 창작된  영화 ‘민족과 운명’에 삽입돼 빠른 속도로 퍼졌다. ‘님을 위한 행진곡’, ‘내 나라 내 겨레’, ‘님을 위한 행진곡’, ‘솔아솔아’ 등은 평양시 중구역에 위치한 윤이상연구소에서 발간한 통일노래집을 통해서도 유포됐다. 윤이상연구소는 한국(통영)출신의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활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1984년 설립됐다.
한류문화 확산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는 그룹 워너원[중앙포토]

한류문화 확산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는 그룹 워너원[중앙포토]

 
2000년대 들어서부터 중국국경 등을 거쳐 몰래 반입된 한국 가요들이 비밀리에 입과 입을 통해 전파되고 체제가 흔들리자 북한당국은 ‘비사회주의 척결’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주민들은 ‘이별’, ‘좋은 날’, ‘이등병의 편지’등의 가요와 엑소를 비롯한 아이돌 그룹 노래를 부르거나 전파했다는 이유로 평양서 추방되거나 처벌당했고 심지어 사형 당하기도 했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 탈북자 최진(가명)씨는 “친구들과 한국 노래·드라마에 접했다가 발각이 되어 쫓기게 됐다"며 "어차피 죽을 길이라면 탈출하자고 생각해 목숨을 걸고 압록강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복원을 강조했다. 내부적으로는 ‘비사회주의 현상 섬멸전’을 내세웠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자본주의적 요소, 특히 한국의 대중문화 유포를 뿌리 뽑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주민들 사이에 번진 한류를 막기는 힘들어 보인다. 김정은이 파견한 예술단이 부른 남한 가요는 바로 이 시간 북한 주민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노래다.
 

김수연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kim.suyeon1@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