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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누가 언 손에 입김을 불 것인가

중앙일보 2018.02.09 01:23 종합 35면 지면보기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8일 오전 평양 김일성광장은 붉게 물들었다. 그 붉은 카드섹션의 물결 위로 ‘김정은’이란 이름 세 글자와 낫(농민)·망치(노동자)·붓(노동당원 지식인)을 그린 노동당기(旗)가 선명했다. 조선인민군의 창건을 기념하는 열병식은 “그래서 나를 어쩔 건데”라며 시위하는 듯했다. 자로 잰 듯 대열 속에서 일명 ‘천리마 발차기’를 하며 행진하는 인민군의 얼굴에서 두려움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전체와 개인이 일치를 이룬 집단 몸짓은 세계를 향해 ‘굽히지도, 꺾이지도, 부러지지도 않겠다’는 각오와 다짐처럼 보였다.
 

대화와 평화 물꼬 틀 ‘평창 도박’
김정은, 열병식 핵무력 자제하고
혈육 김여정 보내 화해 모드 조성
트럼프는 딸 이방카 파견해 호응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선 운명

인민군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주석단에 선 김정은은 여유가 있었다. 군대의 절대적 충성 맹세를 받고 세습체제를 온전히 통제하고 있음을 과시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추정되는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앞세운 군대를 사열하면서 ‘외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전했다.
 
그러면서도 김정은은 냉정했다. 국제사회를 자극하지 않고 평창올림픽의 화해 무드를 의식한 듯 절제했다. 그는 연설에서 ‘미제(美帝) 타도’ 등 한국이나 미국을 비방하는 표현은 없었다. “침략자들이 신성한 우리 조국의 존엄과 자주권을 0.001㎜도 침해하거나 희롱하려 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원론 수준이었다. 아직 그의 진정성을 전적으로 믿기엔 이르다. 하지만 ‘백두혈통’ 동생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남한에 보내고, 핵보유국을 천명할 열병식 수위를 스스로 조절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동족의 경사”(김정은 신년사)인 평창올림픽을 통해 뭔가 반전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다.
 
고대훈칼럼

고대훈칼럼

평창에서 성화가 타오르는 오늘, 김여정이 남녘 땅을 처음으로 밟는다. 올림픽 기간 동안은 평화를 보장하겠다는 김정은의 약속이다. 개막식에 남북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들고 동시 입장하고, 여자 아이스하키는 단일팀으로 경기를 벌이며, 우리 국민과 북한 미녀 응원단은 함께 ‘우리 민족끼리’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칠 것이다. 감동과 환희 속에 분단·전쟁·동맹 대신 통일·평화·민족이라는 낭만적 구호가 우리 사회를 지배할지도 모른다.
 
북한은 평창올림픽을 납치(hijack)했다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우려가 맞다. ‘단일팀-현송월-김여정’이란 블랙홀이 모든 관심을 빨아들이고, ‘평양올림픽’이 되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의 갑질에 짜증나고, 대북제재에 균열을 가하는 ‘예외’를 허용하며 굽실거리는 문재인 정부의 태도가 실망스럽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 그 갈림길 사이에서 ‘평창 도박’은 무력 충돌을 피할 최후의 기회일 수 있다. 평창이 남북 해빙의 단초를 살리고 북·미 대화로 이어져 평화의 물꼬를 틀 도전의 시간들이다. ‘정치 올림픽’이라는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무조건 반대하는 건 그래서 옳지 않다.
 
나는 지난 1월 12일 이 칼럼난에 쓴 ‘이방카와 김여정의 평창 만남을 꿈꾸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꿈꾸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혈육이자 실세인 이방카와 김여정이 평창에 온다면 질주하는 전쟁 위기를 멈추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두 여성이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된다면 평창올림픽을 ‘지상 최대의 쇼’로 만들 수 있다”고 희망했다.
 
그 상상이 현실에 가까워졌다. 워싱턴과 평양은 이방카 백악관 선임고문과 김여정을 폐막식과 개막식에 각각 파견키로 했다. 김여정은 ‘김정은의 후계자’로, 이방카는 ‘최초의 여성 미국 대통령’까지 거론되는 최고의 실세들이다. 자신의 핏줄을 전운이 감돌던 한국에 보내기로 한 최고 통치자의 결단은 이 땅을 평화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라고 해석하고 싶다. 방한 시차 때문에 둘의 만남은 쉽지 않지만 의외의 일이 역사를 만드는 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언 손에 입김을 불어 가며 평화의 불씨를 살리려 애쓰고 있다”(김의겸 청와대 대변인)고 한다. 언 손을 녹이고 맞잡도록 기적을 일궈내는 입김에 이방카-김여정의 입김이 보태질 수 있다. 으르렁거리며 치킨게임으로 치닫는 남성적 근육질의 대결보다는 미소와 사교의 협상술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평양에서 평창은 멀지 않다. 김여정이 폐막식에도 참석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분명히 해둘 게 있다. 북한이 한·미 동맹을 이간질하고 대북제재를 허물기 위한 얄팍한 수작에 농락당한 것이 확인될 경우, 올림픽 흥행의 대가로 터무니없는 청구서를 들이밀 경우, 더는 북한을 용납해선 안 된다. 대결과 충돌이라는 누구도 원치 않는 길로 가지 말아야 한다. ‘평창 도박’에 우리의 운명이 달렸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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