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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가해자 “괴물 욕하면서 제 속의 괴물은 보지 못했다” 공개 사과

중앙일보 2018.02.08 17:58
 한 전직 기자가 언론사에 근무하던 시절 자신이 당한 성추행 피해를 폭로하며 ‘미투’ 캠페인이 언론계로 확산한 가운데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가 공개 사과에 나섰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현재 한 방송국에서 취재기자로 근무 중인 A씨(37)는 7일 회사 게시판에 올린 공개 사과문을 통해 “지난해까지 사건팀에서 함께 지낸 B씨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A씨는 “어떤 말로도 깊게 팬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괴롭기만 합니다. 이런 공개 사과문이 피해자에게 또다시 고통을 주진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라고 시작한 글에서 “하지만 어떻게든 죄송하다는 말은 전하는 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도리라고 생각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고 밝혔다.
 
그는 “겉으로는 괴물을 욕하면서, 제 속의 괴물은 보지 못했다. 천박하고 야만적인 괴물이 제 속에도 있었다”면서 “저의 부주의한 말과 행동이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을지 깊게 헤아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짧은 사과로 미안함을 전하고 사과를 받아준 것으로 착각하며 지금껏 지내왔다. 오랜 기간 그 기억을 마주할 때마다 피해자가 느꼈을 끔찍한 고통에 무감각하게 살았다”며 “좋은 선배 운운했던 저 자신을 돌이키며 발등을 찍을 뿐”이라고 했다.
 
A씨는 “어떤 핑계나 이유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재차 사과했다.
 
그는 “더 큰 괴물이 되기 전에 지금에라도 스스로 깨달을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라며 “평생 자각하고 돌아보고 반성하며 살겠습니다. 어떤 책임도 회피할 생각 없습니다. 여건이 된다면 곧 만나서 다시 사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앞서 B씨(26)는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회식을 마치고 경찰서 야간취재를 하러 돌아가는데 남자 선배가 전화와서는 ‘우리집에서 자고 가라’라고 했고, 다음 회식에선 자신의 집 방향 택시에 (억지로) 욱여넣더니 몹시 불쾌한 일이 이어졌다”고 밝힌 바 있다.
 
관련기사
 
B씨의 페이스북 게시물 전문
#미투#퇴사의직접적요인과는무관합니다

 
— 고백 1  

 
저는 성추행-성희롱 피해자입니다.  

 
여성에게,   
그중에서도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 낮은 여성에게,
사회(직장을 포함한 모든 곳)는 잔인했습니다.  
 
24살 첫 직장에서입니다. 신입교육을 담당한 부장은 대부분의 회식자리에서 제 옆에 앉았습니다. 어떤 날은 웃다가 어깨나 허벅지를 만졌고, 어떤 날은 다리를 덮어놓은 겉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고충을 토로하자 한 남자 동기는 “너 때문에 회식 많이 잡히는 것도 짜증나는데 찡찡대느냐” 고 내뱉었습니다.  
 
25살 두 번째 직장에서입니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며 경찰서에서 지내는 일명 ‘사스마와리’를 할 때였습니다. 회식을 마치고 경찰서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 친하지 않은 한 남자 선배가 전화와서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말했습니다. 웃어넘기고 나니 그다음 회식을 마치고는 아예 자기 집 방향 택시에 저를 욱여넣었습니다. 몹시 불쾌한 일이 이어졌고, 저는 택시를 세워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분명히 백미러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모르는 척 십여 분을 내달렸습니다. 제가 끝끝내 거부하자 가해자가 세워달라 했고, 택시는 그제야 멈췄습니다.

 
26살 일을 하며 처음 사석에서 타사 선배를 만났던 날입니다. 선배는 말할 때마다 제 허리에 손을 감고 귓속말을 했습니다. 술 마시는 내내 한 번도 말리지 않던 형님들은 이제 남자끼리 갈 데가 있다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야근을 하다 밤 늦은 시간 전화 취재를 하면 지금 있는 곳으로 와야 알려주겠다는 경찰도, 지금 5성급 호텔에 있으니 와서 목욕이나 하고 스트레스를 털라는 남성 취재원도 있었습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면접을 보면서 ‘성희롱을 감내할 수 있는가’ 혹은 ‘성희롱의 순간을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따위의 의도를 가진 질문을 종종 받았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는 상황이 어이없고 화가 났지만 태연한 척 답변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사회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저는 피해자가 되어도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대신 화장을 하지 않았고, 목소리는 더 굵게, 어투는 더 남자같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27살 지금은 ‘그런 문화’를 가진 사회(특정 회사가 아닌 우리 모두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꿈을 품고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하지만 ‘예술이 더하면 더했지, 학계도 다를 게 없다’라는 걱정과 조언에는 뭐라 답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 고백 2 (혹은 변명)  

 
서지현 검사의 사건을 접한 뒤로는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미투 에 동참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의 동기, 선배들께 혹시라도 누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회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미투 를 외쳐주길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매일 성추행 관련 뉴스를 마주하며 자괴감에 허덕이고 있을 때, 고생하는 수많은 선배 대신 하필이면 가해자가 정의의 사도로 묘사된 글을 보고 말았습니다.  

 
제 선배들이 사장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중에서도 일부분이지만 결코 작지 않은 비중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한 과오가 드러났습니다. 제 전 직장의 선배들은 정말 감사하게도 ‘남자들끼리 흔히 하는 농담인데 잘못걸렸네’ 가 아니라 성적 가치관의 문제는 결격사유가 된다는 것을 짚어주셨습니다.  

  
그 덕에 여성을 대상화하는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던 나에 대한 각성,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계약직 직원의 일을 자세히 묻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
동료가 아닌 여자로 낙인찍히는 순간 나의 사회생활은 끝난다는 두려움에 분노 대신 사탕발림 같은 완곡한 표현을 썼던 날의 수치심,  
내가 혹시 그들의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했나,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은 아닌가, 나의 불쾌함은 정당한가 스스로 끊임없이 되물으며 왔던 자괴감,  
지금 이렇게 힘들지만, 앞으로는 정말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  
이 모든 것이 결국 ‘낙인’으로 남을지도 모르는 제 아픔을 고백하는 용기가 되었습니다.
 
 
— 끝으로  
 
한동안 가지고 있던 증거들은, 새출발을 하자고 마음먹은 뒤 휴대폰을 바꾸고 모두 사라졌습니다.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달걀로 바위 치기 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고백이 단 한 분에게라도 ‘이래서 여자를 뽑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달라져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귀결됐길 기도하며 잠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힘든 순간 함께 했던 시를 덧붙입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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