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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ROTC 꿈 깨버린 79년 10·26 사태

중앙일보 2018.02.08 01:03
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컷 ㉚ 이종섭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고등학교 1학년 이른 봄쯤인가? 당시에는 친구 10명 중 3명이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머진 집안일을 돕고 있었지만, 저녁마다 어울려 놀았다. 
 
어느 날 누구의 제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들의 굳건한 우정을 다지는 의미에서 집에서 30여 km로 떨어진 직지사로 자전거 하이킹을 가기로 결정했다. 각자 자전거도 빌리고, 스타킹도 사고, 운동화 빨아 신고, 한껏 고르고 고른 모자와 의상, 먹거리 등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발했다.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지나 국도 4호선, 비포장은 면했지만 별로 좋지 않은 도로, 남면 부상리까지는 그야말로 오르막을 겁도 없이 달리고 달려 직지사에 도착하여 한껏 폼을 잡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다.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친구도 보인다. 위치를 지금 가보니 사명각 밑 작은 연못 앞인 것 같다. 좌측 두 번째 서 있는 사람이 나다. 

 
고등학교 때 학도호국단 교련 검열대회를 하던 모습이다. 교련 선생님 뒤 대대장이 나다. 당시 고등학교 교과목에 총화단결과 자주국방 태세확립이라는 명분으로 교련이 있었다. 아마도 제일 하기 싫은 과목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예비역 중위 출신인 김종희 선생님이 제식훈련, 사격 등 기초군사훈련을 군인 다루듯 했으며, 얼차려도 심했기 때문이다.
 
대회는 1년 동안 배운 것을 한번 검열을 맡는 행사는 연중 큰 행사 중의 하나였다. 제식훈련, 열병식과 분열식 등 수업은 젖혀두고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검열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또 대대장이다 보니까 계속 고함을 질러야 하니까 목이 남아나질 않아 정말 진절머리났다.
 
대학 2학년을 마치면 군에 가기로 결정하고, 투트랙으로 일단 ROTC에 지원하고, 떨어지면 전투경찰에 가기로 하고 먼저 입대희망 시기를 지정할 수 있는 전투경찰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그래서 입대 희망을 1980년 6월 말로 해뒀다. 
 
그러고 ROTC에 지원했는데 합격해 1980년 2월 하순경 가입교 하라는 통보를 받고 기다리던 중 역사적인 10.26사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암살사건이 궁정동에서 발생한다. 
 
이 일로 전투경찰은 매월 순차적으로 입대하던 자원을 모두 1980년 1월과 2월에 전부 입대하게 되고, 나 역시 6월 입대가 2월 8일로 변경되어 입대하는 바람에 ROTC 입교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1980년 2월 8일 입대하여 논산 훈련소에서 25연대에서 상반기 훈련 4주를 받고, 이어서 27연대에서 후반기 4주 교육을 받고 대구 서부경찰서로 자대배치 받았지만 봄내 도로 위에서 숙식해야 하는 1980년의 봄은 그리도 길었다. 
 
그리고 난 후 구미경찰서 인동파출소에서 경찰 보조로, 마지막으로는 안동 36사단에서 전투경찰 후배들을 직접 가르치는 조교와 내무반장으로 군 복무를 격동 속에서 보냈다.
 
군에서 취득한 운전면허로 코카콜라 판매사원으로 범양식품(주)에 입사해서 새벽부터 4.5톤 화물차에 코카콜라, 킨사이드 등 음료수를 가득 싣고 달렸다. 
 
포항에서 울진까지 슈퍼마켓으로 다방으로 등짐지고 배달하고, 공병 회수하고, 늦은 밤까지 정산하고 1인 3역을 해냈다. 고생하면서 벌어 모은 돈(1년 동안 500여만원)으로 남은 공부도 하고 결혼도 조촐하게 준비했다.
 
졸업을 한 학기 정도 남겨 둔 1984년 11월 11일, 대학 1학년 첫 미팅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6년 여의 연애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결혼식을 간단히 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학생 신분으로 결혼하게 되니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친구가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피로연 경비가 예상보다 많이 나와서 결국 신혼 여행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당일 집에서 자고 배낭을 메고 제주도로 배낭여행을 떠났지만, 호텔도 아닌 여관에서 자고 용두암, 성산 일출봉을 거쳐 한라산 정상까지 신나게 다닌 추억이 지금은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돌아올 때도 비행기도 못 타고 배 타고 왔지만….
 
졸업 전 서울의 경동제약(주)에 입사했는데 당시 급여가 30여만원, 일일 출장비가 만 원 정도였다. 촌놈이 서울로 와서 생활하다 보니 멀미와 매연으로 오후만 되면 머리가 아파 하는 수 없이 6개월 후쯤 대구지사로 자원할 수밖에 없었다. 
 
제약회사 종합병원 영업이라는 게 당시엔 닥터들과 술자리가 많았다. 결국 건강도 해치고 장기적인 근무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전업하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당시 공무원 급여가 기업의 반 정도밖에 되질 않았다. 그것도 대구에서 김천까지 출퇴근 차비에 밥값에 담뱃값, 술값은 고사하고 도저히 혼자 벌어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아내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공직으로 전업한 게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 갈수록 더 그렇다. 공무원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들을 하는 보람이 너무나 많다. 얼마 전에는 시의회 의원님과 독도 지키기 운동의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했다. 사진은 그곳에서 결의를 다진 장면이다. 사진 가장 오른쪽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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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더오래 더오래팀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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