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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라 못 배운 한 아흔에 풀었어요

중앙일보 2018.02.07 00:12 종합 23면 지면보기
지난달 25일 한글 공부를 위해 울산 남구 무거동 제1경로당에 모인 도란도란 학교 학생들. [최은경 기자]

지난달 25일 한글 공부를 위해 울산 남구 무거동 제1경로당에 모인 도란도란 학교 학생들. [최은경 기자]

“호오두우… 호오두우….”
 

울산 무거동 경로당 ‘도란도란 학교’
4050 교사들에 배우는 7090 학생들
“동사무소 서류에 직접 이름 써 뿌듯”

지난달 25일 울산 남구 무거동 제1경로당. 아흔다섯 살 ‘맏언니’ 주남례씨가 구부러지지 않는 중지로 어렵게 연필을 받치고 공책에 ‘호두’라고 쓰고 있었다. 옆에서는 우말출(90·여)씨가 공책에 ‘미나리’, ‘바나나’를 꾹꾹 눌러 쓰고 있었다.
 
매주 화·목요일 열리는 울산 남구 무거동 제1경로당의 ‘도란도란 어르신 한글학교(이하 도란도란 학교)’ 모습이다. 이 학교는 2016년 4월 이미영(47·더불어민주당) 남구 의원이 주도해 문을 열었다. 경로당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구청에 요청했지만, 예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이 의원과 몇몇 주부가 나선 것이다. 학생은 17명. 80세 이상이 대다수다.
 
이날 경로당엔 한 줄로 늘어선 털신과 여러 대의 보행 보조기가 눈에 띄었다. 출석한 학생은 11명. 90%가 넘는 평소 출석률보다 낮았지만 유례없는 한파도 배움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교사들이 경로당 중앙에 상 4개를 폈다. 교사는 10명 안팎이다. 주로 무거동에 사는 주부들로 40~50대가 많다. 무료 봉사로 일주일에 한 번 수업에 참여한다. 초창기에는 교사들이 돈을 모아 공책·연필 같은 학용품을 샀다. 요즘은 봉사단체인 희망나눔회에서 지원받는다.
 
학생들이 학년별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았다. 교사도 상마다 한둘씩 ‘배치’됐다. 교재는 초등학교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성인문해교육 교재다. 1학년은 기역(ㄱ), 니은(ㄴ)으로 시작해 받침 없는 글자를 배운다. 2학년은 받침 있는 글자도 곧잘 쓴다. 짧은 문장으로 받아쓰기도 한다. 3학년은 잘 읽고 잘 쓰는 학생들로 띄어쓰기나 문장 부호를 익힌다.
 
교사 김미숙(40)씨가 칠판에 ‘2018년 1월 25일 목요일’이라고 썼다. 학생들이 이를 공책에 따라 쓰면서 수업이 시작됐다. 좁은 상아래 학생들의 다리가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아는 우예 됐노?” “감기는 좀 어떠신데예?” 공부하며 도란도란 얘기 꽃을 피웠다.
 
공책에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 95세 주남례씨.

공책에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 95세 주남례씨.

연필을 꼭 쥔 학생들의 손에 힘줄이 투박하게 드러나고 주름이 파여 있었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글자들은 반듯반듯하니 예뻤다. 주씨는 “손주에게 공책을 보여주니 많이 늘었다고 칭찬했다”며 웃었다. 학생들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가며 글씨를 썼다. 공책을 오래 들여다봐 눈꺼풀이 내려오는 탓이다.
 
주씨는 울산 울주군 서생면 해녀 출신이다. 최고령자임에도 유일하게 돋보기안경을 쓰지 않는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은 어려운 점이다. 그래도 교사 입을 보면서 열심히 따라 한다.
 
학생들은 대부분 딸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학교구경을 하지 못했다. 1학년 이동숙(83·여)씨는 “한 자 한 자 아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며 팔다리를 두드려가며 글씨를 썼다. 입학한 지 8개월 된 이기분(72·여)씨는 “동사무소 갈 때마다 이름·주소를 직원에게 써달라 해 부끄러웠다. 얼마 전 내가 직접 쓰니 직원이 깜짝 놀라더라”며 웃었다.
 
이씨는 식당 일을 오래 해서인지 처음에는 손이 떨려 글자를 잘 쓰지 못했다. 지금은 힘이 생겨 받아쓰기도 거뜬히 해낸다. 교사들은 한글 공부가 지식 습득뿐 아니라 기억력과 근력 향상 등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박정필(84·여)씨는 “선생님들이 알뜰히 하나씩 가르쳐주니 머리에 안 들어가도 자꾸 쓰고 읽어보고 싶다”며 “안 죽은 딴에는(죽지 않으면) 계속 배울 것”이라고 의지를 보였다.
 
사제지간 끈끈한 정이 도란도란 학교를 3년째 이어갈 수 있는 힘이다.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직접 짠 참기름, ‘고맙습니다’ 라고 쓴 빗자루, 손수 준비한 식사를 선물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교감 이흥숙(61)씨는 “그 정성이 고마워 눈물이 났다”며 “비 오는 날 삭신이 쑤신다면서도 작은 상 앞에 앉아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이는 학생들에게 교사들이 더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울산=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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