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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의 글로벌J카페] '샐러리맨 신화' 고모리 후지필름 회장은 어떻게 제록스를 인수했나.

중앙일보 2018.02.04 13:07
시작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대학 졸업 후 55년 동안 한 회사에서 인생을 바쳤다. 한순간도 안주하지 않았다. 50대에 임원을 거쳐 60대에 사장, 70대에 회장에 올랐다.
 

승부수는 전통 대기업 제록스 인수
필름 사업 버리고 과감한 변신 성공
세계 최대 사무기기 업체 탄생 예고

마침내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112년 전통의 미국 대기업을 인수했다. 올 가을이면 이 회사의 회장에 취임한다. 후지필름 홀딩스의 고모리 시게타카(79) 회장이다.
 
도쿄 아카사카 후지필름. 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회장.  [사진제공=후지필름]

도쿄 아카사카 후지필름. 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회장. [사진제공=후지필름]

고모리 회장의 후지필름은 최근 미국 제록스의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오랫동안 ‘복사기의 대명사’였던 제록스는 일본 기업을 새 주인으로 맞는다. 
 
시대에 맞춰 변신에 성공한 회사(후지필름)는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회사(제록스)는 남의 손에 넘어가는 신세가 됐다. 일본 기업의 저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후지와 제록스를 합치면 세계 최대의 사무기기 업체가 탄생한다.
 
고모리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일체 경영으로 세계 시장을 노리겠다”며 “개발ㆍ생산에서 유통까지 세계적인 규모에서 상승(시너지)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진국에서 복합기 시장은 성장성이 크지는 않지만, 갑자기 추락할 이유는 없다”며 “아시아처럼 성장하는 시장도 있다”고 말했다.
 
두 회사의 운명을 가른 것은 최고경영자(CEO)인 고모리 회장의 리더십과 개혁 의지, 정확한 방향 판단이었다. 두 회사의 관계는 지난 50여 년 동안 극적으로 변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반세기 만에 본가를 역전”이란 제목을 달았다. 과장이 아니다. 1962년 후지와 제록스는 합작회사를 세웠다. 두 회사가 절반씩 출자한 후지제록스였다.
 
도쿄 아카사카 후지필름. 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회장. [사진제공=후지필름]

도쿄 아카사카 후지필름. 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회장. [사진제공=후지필름]

 
이때만 해도 주도권을 쥔 쪽은 제록스였다. 사업권을 나눠 가졌다.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은 후지제록스, 미국ㆍ유럽 등 다른 모든 시장은 제록스가 맡았다. 후지제록스는 세계 최대 규모인 미국 시장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21세기로 넘어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단순한 복사기의 시대는 저물고, 컴퓨터로 문서를 출력하는 프린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제록스는 시장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제록스는 자금난을 겪자 합작회사의 지분을 대폭 넘겼다. 후지제록스는 후지가 75%, 제록스가 25%의 지분을 보유한 회사가 됐다. 주도권은 확실히 후지로 넘어갔다. 후지제록스는 복사기와 프린터를 결합한 복합기로 시장 변화에 대응했다.
 
제록스는 갈수록 어려워졌지만 후지는 달랐다. 2004년 고모리 사장(당시)은 후지필름 창사 70주년을 맞아 과감한 구조조정을 선언했다. 본업인 필름 사업을 사실상 포기하는 내용이었다.
 
대신 필름 사업에서 얻은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는 신사업을 찾았다. 화학 분야에 대한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화장품ㆍ의약품과 액정용 필름 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도쿄 아카사카 후지필름 본사 '오픈 이노베이션 허브'. 오픈 이노베이션 허브 전경.  [사진제공=후지필름]

도쿄 아카사카 후지필름 본사 '오픈 이노베이션 허브'. 오픈 이노베이션 허브 전경. [사진제공=후지필름]

 
고모리는 종신고용이 당연한 ‘상식’이었던 일본에선 파격적으로 5000명의 인력을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진통이 적지 않았다. 
 
CEO가 직접 나섰다. 직원들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죽는 것보다는 수술하는 게 낫다”고 간곡히 설득했다. 그만둔 직원들에겐 위로금을 포함해 충분한 퇴직금을 쥐여줬다. 그는 “우리의 구조조정은 피도, 눈물도 없는 ‘드라이(dryㆍ메마른)’한 구조조정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2007년 정보기술(IT) 시장에 대변혁이 시작됐다. 미국에서 아이폰이 출시됐다. 스마트폰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종이를 쓰지 않는 ‘페이퍼리스’는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 
 
2008년엔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고모리는 추가 구조조정에 나섰다. 핵심 인재를 해외로 파견해 글로벌 시장에 적극 대응했다. 덕분에 그룹 매출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창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구조조정의 풍랑 속에서 후지제록스는 그룹의 든든한 현금창출원(캐시카우) 역할을 했다. 이번 회계연도(2017년 4월~2018년 3월) 그룹 전체의 예상 매출액은 2조4600억엔(약 24조원), 매출총이익은 9845억엔(약 9조7000억원)에 달했다. 매출의 40%가 넘는 1조700억엔(약 10조원)이 후지제록스의 사무기기 부문에서 나온다.
 
제록스의 인수 과정은 다소 복잡하다. 먼저 후지제록스가 6700억엔을 금융기관에서 빌린다. 이 돈으로 후지필름이 보유한 지분 75%를 자사주로 사들인다. 그러면 후지제록스는 더 이상 합작회사가 아니라 제록스의 완전 자회사가 된다. 제록스는 제삼자 배정 방식으로 유상증자한다. 이 주식을 후지필름이 6700억엔에 사들여 제록스 지분 50.1%를 확보한다.
 
거래가 완료되면 뉴욕 증시 상장기업인 제록스는 이름을 후지제록스로 바꾼다. 제록스 이사회 12명 가운데 과반수인 7명을 후지필름이 지명한다. 제록스는 고모리 회장, 제프 제이컵스 사장 겸 최고경영자(CEO) 체제로 재편된다.
 
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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