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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시대 초월한 행복 담은 천하무적 1호 책

중앙일보 2018.02.04 03:03 종합 20면 지면보기
한순의 인생후반 필독서(5)
지난밤 꿈에 시멘트 담장에 어설프게 기댄 나무 사다리를 바라보며 저걸 타고 올라가 담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야 하나를 갈등하다 깼다. 꿈의 입체 능력은 대단해서 담 너머의 세상도 보였다. 담 너머의 세상도 무연하게 지금 사는 세상과 별다를 것이 없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거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다만 꿈에서는 그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다 느껴졌다. 걷고 있는 저 사람은 조금 슬프고, 막 집으로 들어서려는 저 사람은 곧 포근한 안방에서 편한 휴식에 들려고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서평을 쓰려고 피천득의 『수필』을 꺼내 놓고 꾼 꿈이다.
 
 
수필. 피천득 지음. 범우사.

수필. 피천득 지음. 범우사.



 
피천득『수필』서평 쓰려다 꾼 꿈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고 도깨비방망이라도 내리친 듯 새로운 기술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젊은 친구들이 대대적인 독서 클럽 ‘트레바리’를 탄생시키는가 하면, 고불고불 골목길을 돌아 그림처럼 박혀 있는 파란 창문의 작은 책방을 탐험하듯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 최첨단 기술 개발과 확장은 인류 발전의 척도이기도 하겠으나 그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커지면서 일종의 운명 같은 억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피천득론』을 쓴 김우창 교수의 말을 인용해 피천득 『수필』을비유해 보면 “기술 개발이 운명이라면, 이 거대한 운명에 대항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누구나 큰 것만을 위하여 살 수는 없다. 인생은 오히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에 있는 ‘찰스 램’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나와의 유사성이 너무나 없기 때문인가 보다. 나는 그저 평범하되 정서가 섬세한 사람을 좋아한다. 동정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고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곧잘 수줍어하고 겁 많은 사람, 순진한 사람, 아련한 애수와 미소 같은 유머를 지닌 그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이 문장을 읽다가 새삼 소스라쳐 놀랐다. 피천득의 『수필』은 책꽂이에 늘 꽂혀 있어 몇 번을 읽었는지 가늠하기 힘든 책이었는데, 나의 인생관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물이 스미듯 선생의 생각과 철학이 녹아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책을 만들면서 각 분야의 전문 서적을 공부하며 한 땀 한 땀  진도를 나가다가 영 효율이 나지 않을 때 나는 종종 피천득의 『수필』을 집어 들었다. 작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이 문고본 책은 한 시간 정도 고요히 바라보고 있으면 곧 삶의 물결들이 되살아나곤 했다.
 
종달새, 푸른 숲, 파란 하늘, 여름 보리, 어머니, 피아노 소리, 싱싱한 야생 백합, 맨발로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시골 처녀, 비 오는 오월 어느 날 비원, 젖 먹는 아기 등의 낱말을 읽어가다 보면 우리를 누르고 있는 커다란 운명이 공중에서 분해되듯 사라지고 천하무적의 순수와 본래의 물성과 감성이 그 자리를 가득 채운다.
 
 

꾀꼬리 우는 오월이 아니라도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우산을 받고 비원에 가겠다. 눈이 오는 아침에도 가겠다. -비원



 
후세의 날 위해 설계된 비밀의 궁전
피천득 작가(1920.5.29~2007.5.25).

피천득 작가(1920.5.29~2007.5.25).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어딘가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늘 올라오곤 했는데, 그곳이 바로 비원이었다. 피천득 선생이 내게 심어준 나들이의 개념이다. 피천득 선생은 이 비밀 궁전에서 왕들은 이 정원을 제대로 못 누렸을 것이라 했다. 
 
광해군은 눈이 혼탁해서, 숙종은 너무 어진 나머지 늘 마음이 편치 않아 향기로운 풀 냄새를 누리지 못하였으리라 유추했다. 그래서 후세에 올 나를 위해 설계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했다. 멋진 환치다.
 
한 손에 들어오는 책, 주머니에 쏙 넣을 수 있는 책, 얇은 가방에도 들어가는 책 중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책을 본 적이 없다.
 
“시대와 삶의 조건이 험할수록 삶의 아름다움과 마음의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된다.” 『피천득론』의 한 귀절이다. 일찍이 선생이 사시던 시대에도 예견되었던 삶의 어려움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은 안에다 가꾸는 꿈의 공간에서 비롯한다. 이것을 버릴 때,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세상은 또다시 황량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행복을 잡고 싶다면, 사람 사는 호흡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나는 이 책을 천하무적 1호의 책으로 꼽고 싶다.
 
한순 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ree3339@hanmail.net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news.joins.com/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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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 한순 시인, 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필진

[한순의 인생후반 필독서] 노후에 들어선 사람은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는 게 필요하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예전에 밑줄 치며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는 것이다.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 인생 후반부에 제2의 사춘기를 겪게 될지 모른다. 흔들리는 대로 나를 맡겨보자. 또 퇴직하게 되면 만나는 사람의 범위가 좁아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외로움과 고독이 밀려온다. 이럴 때 책 읽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이 돼 줄 수 있다. 출판사 대표가 인생 후반부의 필독서는 어떤 게 있고 책 읽기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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