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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NHK 대하드라마를 보는 이유

중앙일보 2018.02.02 01:37 종합 31면 지면보기
남윤호 도쿄 총국장

남윤호 도쿄 총국장

올해 일본 NHK 대하드라마의 타이틀은 ‘세고돈(西鄕ドン)’. 주인공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이다. 하야시 마리코(林眞理子)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소위 ‘유신 3걸’이 모두 등장하니, NHK로선 메이지유신 150년 기념작인 셈이다. 시청률은 14~15%로 저공비행 중이지만 사이고의 존재감이 약한 건 결코 아니다. 몇 년 전 아사히신문이 바쿠후 말기 인물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는 설문에서 그는 3위에 올랐다. 1위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2위는 이 둘에게 개화의 영감을 준 가쓰 가이슈(勝海舟)였다.
 

정한론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인공
평가 엇갈리는 메이지 시대 사극
침략주의는 또 어찌 포장할지

지금이야 일본 열도에 초식남들이 넘치지만 19세기 중후반엔 달랐다. 열혈청년들이 질주했다. ‘유신 3걸’의 메이지 원년 때의 나이를 보자. 사이고 39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38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35세였다. 메이지 정부 수립을 못 본 채 먼저 죽은 이들도 많다. 대외 팽창주의를 주장하며 과격파 사무라이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29세, 삿초(薩長)동맹을 주선한 료마는 32세, 조슈(長州)의 무사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는 각각 24, 28세에 목숨을 잃었다. 대개 20~30대에 칼 빼들어 생애의 업을 이뤘다.
 
지금 20대 중반이면 취업 준비로 바쁘고, 30대면 재테크에 고민할 때쯤 아닌가. 150년 전 그들은 인생의 축적이 채 쌓이기도 전에 어떻게 그런 발자취를 남겼을까. 당시 하늘이 도와 천재와 신동을 온통 일본에 뿌려준 걸까.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때려 부수는 일이었기에 축적 없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고혈압에 가까운 젊은 혈기의 에너지로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메이지 리더들의 인기는 젊은 층에서 탄탄하다. 1월 1일 새벽 NHK 생방송엔 료마의 고향 고치(高知), 사이고의 출신지 가고시마(鹿兒島)가 나왔다. 20대 초반의 여성이 료마상 앞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료마처럼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 사이고의 동상 앞에 운집한 청년들이 함께 함성을 지르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중앙시평 2/2

중앙시평 2/2

같은 청춘이기에 느끼는 친근감도 있겠으나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역사적 인물을 상징화시키는 일본인의 재주다. 인물의 정수를 증류시킨 뒤 구미에 맞게 블렌딩하거나 칵테일로 만든다고나 할까. 묵직한 걸 좋아하는 이들에겐 묵직하게, 가벼운 게 먹힐 법한 이들에겐 가볍게 가공해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세기 일본 메이지 리더들은 존경과 숭앙 일변도의 대상에서 벗어나 때로는 친근한 인생 선배, 때로는 행운을 가져오는 부적으로도 다가온다. 개인의 일상 속으로 사유화하기엔 너무 무겁고 커 보이는 인물들인데도 말이다. 비장한 최후를 맞은 사이고까지 애교스러운 캐릭터로 만들어져 기념품 가게의 열쇠고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료마는 더 나간 케이스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료마가 간다』가 히트하면서 실존과 가공의 경계가 애매해졌다. 실제 인물은 龍馬, 소설 속 인물은 竜馬로 구분하고는 있으나 이미 뒤섞이고 난 뒤다. 실제에서건 픽션에서건 원하는 의미를 찾는 방법이 신묘하다. 의도적 분식과 선의의 재해석이 교차한다. 예컨대 료마의 무기 밀무역이 일본 최초의 종합상사 비즈니스로 상찬받기도 한다.
 
다만 이번에 NHK가 선택한 주인공 사이고에 대해선 아직 평가가 엇갈린다. 근대와 반근대, 혁명과 반혁명이 한 몸에 투사돼 있다. 이를 외국인이 판정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 부각되는 건 그의 정한론이다. 나중에 정한론은 침략으로 실행됐다. 또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할 때 내세우는 아시아주의의 연원으로도 평가된다.
 
사이고의 고향에서도 정한론을 거북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외국인에게 관광자원으론 내세우기엔 적합지 않기 때문이다. 사이고와 관련된 유적지엔 정한(征韓) 대신 ‘견한(遣韓)’ 또는 ‘조선 문제’로 표기해놨다. 이 또한 역사 블렌딩인지 모른다.
 
어느 사회에서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묵직한 교훈을 구하는가 하면, 덜 풀린 분노의 앙금을 캐내기도 한다. 대개는 현시점에 필요로 하는 것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일본은 지금 과거에서 새로운 에너지 찾기에 한창이다. 그게 ‘메이지 유신 150년’의 용처다.
 
블렌딩 기술 하나는 탁월하니 원하는 상징과 의미를 추출할 것으로 보인다. NHK 대하드라마 역시 그 하나다. 원작에선 조선에 모욕을 당했으니 정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볍게 넘어간다. 드라마에선 이를 어찌 다룰지 두고 볼 일이다.
 
남윤호 도쿄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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