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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 환자들, 병원 무섭다며 퇴원 졸라"…현장 상담 의사가 말하는 '화재 그 후'

중앙일보 2018.01.30 02:00
28일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 화재 참사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밀양문화체육회관에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밀양=송봉근 기자

28일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 화재 참사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밀양문화체육회관에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밀양=송봉근 기자

"지금 밀양에는 '왜 못 구했을까'라는 죄책감과 원망이 강하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재난 심리지원 전문가인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은 참사를 겪은 경남 밀양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밀양과 맞닿은 창녕군에서 근무하는 이 원장은 세종병원 화재 직후인 26일 오전 10시 30분께 현장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5일째, 여전히 현장을 지키며 부상자ㆍ사망자 유족 등에 대한 정부 심리 지원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29일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병원 회진 돌듯 아침부터 화재 피해자들을 만나고 있는데, 각자 다양한 트라우마가 나타나고 있다"고 걱정했다.
 

이영렬 원장, 참사 직후부터 밀양 심리 지원
화재 피해자는 단시간에 극심한 '트라우마'

"왜 병원에 모셨을까" 남은 유족은 회한·분노
병원 직원들, 동료 사망 등에 스트레스 '위험'

치매 환자, 표현 못 해도 건강 악영향 우려
이들 도운 의인도 "못 구한 사람들 떠올라"

피해자 위로하는 이 원장도 대학 선배 숨져
"영정 보고 알아, 말이 안 떠올라 유족 못 봐"

 이 원장은 지난해 포항 지진 당시 재난 피해자 상담을 맡았다. 그 전에도 태안 기름 유출 사고(2007년), 세월호 사고(2014년), 경주 지진(2016년) 등 굵직한 현장을 겪어왔지만 "이번에는 더 긴장된다"고 했다. 화재 현장 지원이 처음이어서가 아니다. 여진 등으로 스트레스가 꾸준히 올라가는 지진과 달리 화재는 짧은 시간에 극심한 트라우마가 훅 몰려온다는 것이다. 그는 "피해자들이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충동적인 선택을 할 수 있어서 24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병원에 입원중인 경남 밀양 화재 부상자와 심리 지원 상담중인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가운데)과 직원. [사진 이영렬 원장]

병원에 입원중인 경남 밀양 화재 부상자와 심리 지원 상담중인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가운데)과 직원. [사진 이영렬 원장]

 39명의 희생자를 남긴 이번 사고는 '병원'과 '화재'가 가장 큰 특징이다. '내가 왜 이런 병원에 우리 어머님을 모셨지'라는 회한, '왜 이 지경이 되도록 환자들을 구하지 못했냐'는 분노…. 이런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남은 이들을 힘들게 한다. 세종병원에 입원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특히 "병원이 너무 무섭다"는 호소가 가장 많다. 이 원장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공간에서 너무나 무력하게 당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병원으로 옮긴 몇몇 노인 환자들은 “무조건 집에 가겠다”며 가족들에게 퇴원을 조르는 경우도 꽤 된다고 한다.
 
 불이 난 세종병원은 유독 노인 환자가 많았다. 입원 환자의 70%가량이 70대 이상이었다. 요양병원을 같이 운영하고 있어 치매를 앓는 환자도 많았다. 제대로 의사 표현을 못 하는 이들도 똑같은 피해자다. 알게 모르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불면증이 오거나 식사도 거르고 인지 기능이 확 떨어지는 식이다. 이 원장은 "자기가 트라우마라고 호소는 못 하지만 건강에 악영향을 받는 건 분명하다. 뭔가에 놀란 아기들처럼 잠도 못 자고 동동거리면서 신체 상황이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26일 밀양 세종병원 화재 때 치매 노인들을 무사히 대피시킨 요양보호사 이모씨의 뒷모습. 구조·대피 과정에서 유독가스를 들이마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6일 밀양 세종병원 화재 때 치매 노인들을 무사히 대피시킨 요양보호사 이모씨의 뒷모습. 구조·대피 과정에서 유독가스를 들이마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수많은 생명을 구한 '의인'도 재난의 파도를 비껴가지 않는다. 건물 5층(요양병원)에 입원한 치매 노인 16명을 무사히 대피시킨 요양보호사 이모(58) 씨도 안도감 대신 안타까움이 더 크다고 했다. 이 원장은 "그분도 구한 사람들을 떠올리기보다 미처 구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전했다.
 
 현 상황에서 제일 걱정되는 위험군은 누굴까. 이 원장은 세종병원 직원들을 꼽았다. 다함께 일한 직원들은 3가지 어려움을 동시에 겪고 있다. 의사ㆍ간호사를 포함한 총 26명의 근무자 중 3명이 숨졌다. 일상을 나누던 동료의 10%를 순식간에 잃은 셈이다. 거기에다 경찰 수사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칼날이 조여오고 있다. 경제적 기반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도 크다. 이들은 병원이 문을 닫으면서 집에 머무르며 대기하고 있다. 밀양 같은 소도시에서 이러한 대규모 인원이 새로 취직하긴 쉽지 않다. 이 원장은 "앞으로 받을 스트레스가 더 커질 것이라는 점에서 병원 직원들의 트라우마가 제일 걱정된다"고 말했다.
26일 화재가 난 경남 밀양 세종병원 응급실 앞에 쓰고 난 소화기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26일 화재가 난 경남 밀양 세종병원 응급실 앞에 쓰고 난 소화기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밀양 화재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당직 의사 민현식 씨가 평소 입었던 의사 가운. 이은지 기자

밀양 화재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당직 의사 민현식 씨가 평소 입었던 의사 가운. 이은지 기자

"사실 저도 매우 힘들어요. 얼굴을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슬픔에 빠진 피해자들을 온종일 챙기고 위로하는 이 원장도 알고 보면 사고의 피해자다. 중앙대 의대 1년 선배인 민현식(59) 씨가 숨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다. 화재 당시 병원 당직 의사였던 민 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 대피를 위해 애쓰다 1층 응급실 주변에서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주변에선 평소 인품을 갖춘 그가 황망히 떠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의사자' 지정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원장은 합동분향소의 영정 사진을 보고 오랜만에 마주한 선배의 죽음을 알아차렸다. "저는 정신과이고 선배는 정형외과였지만 의대 6년간 한 건물을 썼어요. 동선이 겹치니까 얼굴이 기억나죠"라면서 "말수가 적었지만 굉장히 점잖고 후배에게 거친 말 하지 못 하는 분이었죠. 저는 그때보다 살이 많이 쪘는데 선배는 얼굴에 살이 많이 안 쪄서…"라고 말을 흐렸다. 그러면서 "당장 어제(28일)도 합동분향소에서 조문객을 맞는 부인분이 펑펑 우셨죠. 빈소는 다행히 오늘(29일) 차려졌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 부인분을 못 뵙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경남 밀양 화재 피해자의 집에서 심리 지원 상담을 하고 있는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오른쪽)과 직원들. [사진 이영렬 원장]

경남 밀양 화재 피해자의 집에서 심리 지원 상담을 하고 있는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오른쪽)과 직원들. [사진 이영렬 원장]

 밀양에는 한 병원이 통째로 옮겨온 것과 같은 규모인 정신보건 요원·전문의 32명(29일 기준)이 심리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이들 지원팀은 사망자 유족, 부상자 등 모든 피해자와 한 번 이상 면담을 진행했다. 보건복지부는 밀양에 머무르는 사람뿐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옮기거나 돌아가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각 지역 정신건강센터 등을 활용해 꾸준히 상담과 모니터링을 이어갈 예정이다.
밀양 화재 그 후...
28일 밀양 문화체육회관 합동분향소에서 적십자 봉사원이 밀양 화재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심리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밀양 문화체육회관 합동분향소에서 적십자 봉사원이 밀양 화재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심리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원장도 화재 피해 수습이 마무리될 때까지 현장을 지킨다. 그는 "밀양 시민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힘든 분들을 돕는다는 목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피해자들에게 다가갔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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