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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WTO … 중국 ‘시장경제지위’ 부여 고심

중앙일보 2018.01.30 00:02 경제 4면 지면보기
J포커스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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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2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중국과 유럽연합(EU)의 연례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날 양자는 기후변화에 대응한 협력 강화 합의문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영국의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전에 합의문을 입수해 보도했다.
 
정상회담 며칠 전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5년 합의한 파리기후변화 협약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이 협약은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합의해 미온적이던 중국의 온실가스 감축 동참을 얻어낸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EU의 기후변화 공동 대응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경고하고 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힘겹지만 유용한 노력으로 보였다. 막상 양자의 기후변화 협력 강화 합의문은 나오지 않았다.
 
결렬의 주범은 중국이 EU에 공동대응의 대가로 ‘시장경제지위(Market Economy Status: MES)’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MES 인정 받으면 수출 급증
 
중국의 대미 수출액과 반덤핑관세 판정 받은 비중

중국의 대미 수출액과 반덤핑관세 판정 받은 비중

매우 단순한 용어처럼 보이는 MES, 중국은 이를 인정받으려고 사활을 걸고 있다. 반면에 EU와 미국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다자주의 무역체제 유지라는 입장에 공감해 공동대응 중이다. 이 분쟁의 해결 방향에 따라 WTO(세계무역기구) 체제의 유지나 약화가 결정된다.
 
WTO의 전신은 1947년 출범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다. 원래 자본주의 국가만 회원국이었으나 1960년대와 1970년대 공산권에 속했던 헝가리와 폴란드 등이 가입했다.
 
공산권 국가의 국영기업은 상품을 자본주의 국가에 수출했다. GATT는 반덤핑을 결정할 때 시장경제, 비시장경제를 구분할 수 있게 했다.
 
수입품의 가격이 수출국의 국내 가격보다 지나치게 낮아 수입국 산업에 피해를 줄 때 수입국이 조사해 부과하는 게 반덤핑관세다. 이때 기준이 되는 게 수출국 국내 판매가격이다. 이걸 정상가격(normal value)이라 부른다.
 
비시장경제에서는 사실상 국가가 생산을 담당한다. 수입국은 비시장경제 지위 국가에서 온 수출품에 대해 고율의 반덤핑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수입국은 반덤핑을 조사할 때 시장경제 지위가 아닌 회원국의 수입품 대체가격을 사용할 수 있다. 시장경제 지위에 있는 제3국 가격과 동종 수입품 가격을 비교하는 것이다. 
 
중국, 2016년 미국·EU WTO 제소
 
시장경제지위(MES) 관련 쟁점

시장경제지위(MES) 관련 쟁점

문제의 발단은 중국의 2001년 WTO 가입 의정서이다. 이 의정서 15항 (d)는 수입국 법이 중국을 시장경제로 인정하면 반덤핑 조사를 종료한다고 규정했다. 이어 중국의 WTO 가입 15년 후에는 비시장경제 분류에 따른 반덤핑 조사 방식이 종료된다고 명시했다.
 
중국은 이 규정 (d)에 근거해 2016년 12월 11일 가입 15년이 되었고 이 조항에 따라 비시장경제 지위가 자동으로 폐지된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EU가 이 규정을 위반해 중국에 시장경제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게 중국의 주장이다.
 
중국은 이를 근거로 2016년 12월 미국과 EU를 WTO에 제소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인지 대미 제소를 중단했지만 EU에 대한 심리는 최근에 개시됐다. 분쟁 해결은 2~3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인다.
 
EU는 GATT 6조 조항과 그 간의 통상분쟁 해결의 판례를 들어 중국의 주장을 반박한다. 6조는 각종 보조금을 받아 저가 수출된 상품에 대해 수입국이 조사하여 반덤핑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요건을 규정한다.
 
이 조항에 따르면 수입국 법에 따라 수입국이 결정할 수 있는 재량권을 보유한다고 본다. GATT에 가입했던 동유럽 국가가 1990년대 시장경제로 체제전환을 시작해 시장경제지위를 인정받았을 때도 이 과정을 거쳤다.
 
미국과 EU가 보기에 중국은 아직도 경제에서 국영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각종 산업에 주는 보조금도 많다. 미국은 EU 입장을 지지하는 40페이지 분량의 의견서를 지난해 11월 말 WTO에 제출했다. 미 행정부는 이 분쟁이 WTO 체제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 EU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 EU 집행위원회 세실리아 말름스트롬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미국과 조율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 무역당국, “중국 승소하면 재앙”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 대표는 지난해 6월 의회 증언에서 “이게 WTO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분쟁”이라며 “중국이 승소할 경우 재앙이다”라고 말했다. 중국이 이 분쟁에서 승리하면 중국의 수출품에 반덤핑 관세를 매기기 어려워져 중국의 수출은 더 늘어난다.
 
2000년 중국의 대미 수출 상품 가운데 반덤핑 규제를 받은 비중은 1.5%가 되지 않았다. 2001년 12월 중국의 WTO 가입 후 대미 수출은 급증해 2015년 4배나 늘어났다. 이에 비례해 2015년 말 중국의 대미 수출 승품액의 7% 정도가 미국의 반덤핑관세 철퇴를 맞았다. 중국의 최대 교역상대국인 EU는 2016년 말을 기준으로 중국 수입품 총액의 6%에 반덤핑관세를 부과했다.
 
중국은 자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을 협상할 때 MES 인정을 협상 타결의 조건으로 제시해 관철하는 공세적인 전략을 구사해왔다. 2003년 뉴질랜드, 2005년 호주, 페루, 칠레가 중국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한국은 FTA 협상과 별개로 2005년에 중국의 시장경제 지위를 인정했다.
 
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의 채드 브라운 연구원은 MES 분쟁 때문에 올해 미국과 중국의 통상 전쟁 포연이 짙어질 수 있다고 예상한다. 지난 23일 미국이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전지에 대해 수입을 제한한 것도 일각에서는 중국에 대한 전초전으로 분석한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진행자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진행자

미국과 EU는 중국의 공세에 대응하여 반덤핑 관련 규정의 개정 등 무역방어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무역 의존도가 국내총생산(GDP)의 80%가 넘는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이 격화하는 통상전쟁에 치밀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우리의 준비는 미흡한 것 같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트 안쌤의유로톡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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