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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 계약 해지·모욕·블랙리스트'…목소리 높이는 웹툰작가들

중앙일보 2018.01.22 12:07
"회사 측에서 '입맛을 안 맞추면 다른 플랫폼 알아보는 게 나을 거다'라는 태도로 나와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런데 계약서를 쓸 때 작품의 예상 횟수란을 비워두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이상했습니다. 회사 요구로 초기 콘셉트·메인 주인공 바꾸고 연재 중에도 콘티를 다 아예 갈아엎는 것까지 감수했는데 제게 돌아온 건 연재 중단을 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 T작가  
 

작가들 경험담 담긴 '비공정 관행 모음집'
일방적 계약 해지, '성인물로 바꿔라' 요구
현직 작가 "연재 한 번 시작하면 몸 망가져"
문체부는 웹툰 표준계약서 개정안 연구 중
"조만간 작가·전문가 등 모아 토론회 할 것"

"소설 안에 웹툰을 넣는 형식인 '웹툰소설' 플랫폼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4화 작업 중이었을까요. 회사 측에서 수익이 잘 안 생긴다며 원래 하던 작업물 대신 성인물을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그 작업을 3화까지 진행했는데 플랫폼 자체의 인기가 떨어지자 담당자 분은 다른 부서로 옮겨졌고 회사 측에서도 더 이상 연락이 없었습니다. 고의로 전화를 피하는 것인지 단 한 번도 받지 않더라고요." - B코믹스 G작가
 
지난해 말부터 국내 웹툰작가들이 트위터 상에서 각자의 사례를 모아 만든 '웹툰작가 비공정 관행 사례 모음집' 내용 중 일부다. 일방적인 계약 해지 통보, 모욕발언 등 수십여 명의 작가들이 털어놓은 경험담은 다양했다. K사와 일했던 H작가는 "계약 후 만화를 보내달라고 해 1~2화를 보내자 '그림이 너무 뚱뚱하다''인기가 많은 신체 부위를 부각해 그려달라' 등 무례한 수정 요구들이 들어왔다. 수정에 수정이 이어졌고 그 상태로 몇달째 연재에 대한 확답도 못받은 채 6화 정도의 분량을 그렸다"며 "이 기간 원고료도 지급이 안 돼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D작가는 "웹툰 플랫폼 업체 M사에서는 계약 전 고료가 너무 적다고 하자 '연재 시켜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하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업체인 B사에서는 동성애 만화를 연재하고 싶다고 했을 때 담당자가 위아래로 훑으며 레즈비언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한 웹툰작가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트위터 캡처]

한 웹툰작가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트위터 캡처]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웹툰시장 규모는 7240억원 규모로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다. 하지만 아직 작가들의 근로환경은 그 성장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웹툰 '양극의 소년'을 그린 은송 작가는 "연재를 한 번 시작하면 작가 대부분이 외출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매주 마감에, 담당자 수정 요구에 시달려 몸이 망가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어시스트를 고용할만큼 고료가 높지도 않다"고 지적했다. 웹툰 '월한강천록'의 회색 작가도 "신인 작가들은 '기다려 달라'는 담당자 말에 수개월 간 무급에 그림만 그리다 결국 연재를 못하고 그만두기도 한다"고 전했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웹툰 작가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말 레진코믹스에서 웹툰을 연재하던 회색 작가가 "해외 연재분 수익을 사측으로부터 받지 못했다"고 폭로한 뒤 '벙어리 냉가슴'만 앓아온 작가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자체 마감일을 지정해놓고 마감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급여에서 '지각비'를 떼어가는 관행도 도마에 올랐다. 
 
지난 11일 서울 논현동 레진코믹스 본사 앞에서 작가와 독자 100여 명이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지난 11일 서울 논현동 레진코믹스 본사 앞에서 작가와 독자 100여 명이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지난 11일 작가·독자 등 100여 명은 서울 논현동 레진코믹스 본사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당시 은송 작가는 "작가들 복지 문제를 SNS에 지적한 뒤부터 사내 블랙리스트 작가로 이름이 올라 사이트 내 프로모션 등에서 작품 노출이 제한됐다"고 밝혔다. 이후 16일에는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블랙리스트' 논란에 항의하는 1인 시위를 벌였고 한국만화가협회·한국웹툰작가협회는 레진코믹스에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레진코믹스 측은 "소통이 미흡한 점이 있었다. 작가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지각비(지체상금)는 폐지하기로 했고 MG(미니멈 개런티)도 인상했다"며 "블랙리스트를 운영했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한국웹툰작가협회가 만든 '웹툰작가를 위한 계약 체크리스트'. [사진 한국웹툰작가협회 트위터]

한국웹툰작가협회가 만든 '웹툰작가를 위한 계약 체크리스트'. [사진 한국웹툰작가협회 트위터]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9월 서울시·웹툰 플랫폼 3개 업체와 '공정한 웹툰 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은 뒤 표준계약서 문안, 저작권 보호 및 공정한 수익배분을 위한 방안 등을 연구하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웹툰시장이 커지면서 작가들의 수익분배 방식이 다양해졌는데 현재 표준계약서에는 간단한 형태의 계약만 전제하고 있어 현실에 맞게 고치려 한다"며 "이달 말이나 다음달 초쯤 웹툰작가들과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개최해 의견을 청취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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