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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필은 왜 6시간짜리 바그너 공연에 도전했을까?

중앙일보 2018.01.22 09:18
2015년 시작된 홍콩필의 바그너 '링' 사이클이 끝났다.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015년 시작된 홍콩필의 바그너 '링' 사이클이 끝났다.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8일(현지시간) 오후 6시 시작한 공연은 자정에 끝났다. 홍콩 젠사쥐(尖沙咀)에 있는 홍콩 문화센터 콘서트홀. 휴식 두 번을 포함해 6시간 이어진 공연은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마지막인 ‘신들의 황혼’이었다.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얍 판 즈베덴, 13명의 독창 성악가와 합창단이 올랐다.

홍콩필하모닉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 막 내려
홍콩 현지 리뷰

홍콩과 바그너의 조합은 생경했지만 뜨거웠다. ‘니벨룽의 반지’는 바그너가 26년동안 완성시킨 대작이다. 인구 700만여명의 홍콩에서 홍콩필은 2015년부터 4개 오페라를 완주했다. 음반사 낙소스에서 모든 실황을 녹음해 음반으로 발매했다. 오페라 4부작의 총 공연 시간은 20시간에 이른다. 이날 공연은 그 여정의 마지막이었다.
 
 
홍콩 콘서트홀은 크지 않다. 여기에서 ‘신들의 황혼’을 연주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거대한 크기의 소리를 원한 바그너는 호른 8대, 하프 6대, 트롬본 4대, 트럼펫 4대 등을 포함하는 편성으로 오케스트라 음악을 썼다. 이날 무대에 오른 단원은 110명, 합창단은 80명이다. 이야기는 신과 인간에 관한 것이다. 라인강의 황금 반지를 놓고 시작된 저주가 한 여인의 희생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마지막 편인 ‘신들의 황혼’이다. 이날 홍콩 콘서트홀 객석은 바그너의 장대한 세계를 경험하는 청중으로 들어찼다. 총 2000석 중 1100석이 유료 판매됐다.
 
'신들의 황혼'에 동원된 6대의 하프.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들의 황혼'에 동원된 6대의 하프.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연주력이었다. 홍콩필이 ‘니벨룽의 반지’ 전막을 연주한 것은 1957년 창단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현악 주자들은 바그너가 정교하게 디자인한 소리의 굴곡을 기민하게 따라잡았다. 어려운 음악의 요점을 전달하는 연주였다. 인간 영웅의 등장을 알리는 호른의 음색은 소리의 중심을 단단하게 간직하고 청중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비록 무대 장치와 연출이 없는 콘서트 오페라 형식이었지만 바그너 특유의 거창한 색채, 그 속에서도 살아나는 위트있는 음악이 세계적 수준으로 재현됐다.
 
특히 신 중의 신 보탄의 딸인 브륀힐데 역의 소프라노 군-브리트 바르크민(독일)은 새로운 발견이라 할 만큼 빛이 났다. 그의 음성은 100대 넘는 악기 소리를 손쉽게 뚫고 나왔다. 세 막에 걸쳐 쉬는 시간이 없는 역할인 브륀힐데는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선명한 소리를 6시간 동안 뽑아냈다. 바크민은 브륀힐데 역을 처음 맡았다. 그 외에도 최근 바그너의 지그문트 역으로 각광받는 테너 대니얼 브레나(미국), 100회 넘게 ‘니벨룽의 반지’에 출연한 베이스 에릭 할바슨(미국) 또한 홍콩의 바그너 공연을 유럽ㆍ북미 수준에 걸맞게 올려놨다.
 
브륀힐데 역을 처음 맡아 성공적으로 공연한 소프라노 군-브리트 바크민.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브륀힐데 역을 처음 맡아 성공적으로 공연한 소프라노 군-브리트 바크민.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홍콩와 바그너라는 독특한 조합의 성공 뒤에는 지휘자 얍 판 즈베덴(58)이 있다. 네덜란드 태생으로 2012년 홍콩필을 맡은 그는 오케스트라 업그레이드를 위해 여러 방법을 썼다. 홍콩필은 하이든ㆍ모차르트 같은 고전시대로 기본기를 쌓고 말러 등에서 사운드의 한계를 넓혀나갔다. 매해 150회 넘는 횟수로 연주를 잡고, 해외 투어를 적극적으로 계획했다. 4년에 걸친 ‘니벨룽의 반지’ 전곡 연주ㆍ녹음은 그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즈베덴은 홍콩필의 업그레이드를 인정받아 미국 뉴욕 필하모닉의 새로운 음악감독으로 낙점됐다. 올해 임기를 시작한다.
 
홍콩필하모닉을 2012년부터 맡아 세계적 화제의 교향악단으로 올려놓은 후 올해 뉴욕필도 겸임하는 얍 판 즈베덴.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홍콩필하모닉을 2012년부터 맡아 세계적 화제의 교향악단으로 올려놓은 후 올해 뉴욕필도 겸임하는 얍 판 즈베덴.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7일 홍콩에서 만난 즈베덴은 “6년 전 홍콩필에 왔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것이 ‘무엇이 빠졌나’였다. 아무도 생각조차 안 해본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했다. 그는 ‘니벨룽의 반지’를 떠올렸고 이를 위해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즈베덴은 “단원뿐 아니라 홍콩 청중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했다. 즈베덴은 바그너의 복잡하고 거대한 음악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끝없이 연습시켰다. 이번 ‘신들의 황혼’ 공연을 위해서는 거의 1년 전부터 연습을 시작했고, 7주 전에는 전곡을 실연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을 시켰다. 즈베덴은 “그 결과 홍콩필이 바그너의 어두운 소리 내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했다.
 
성악가들은 즈베덴을 두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휘자”라고 했다. ‘신들의 황혼’에서 구트루네 역을 맡은 소프라노 아만다 마제스키(미국)는 “내가 16분 음표를 조금 먼저 불렀다는 이유로 연습을 중단시켰을 정도”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작은 디테일 때문에 연습을 멈췄다. 그는 악보의 모든 것을 외우고 있다”고 했다. 테너 대니얼 브레나는 “즈베덴은 오랫동안 세계적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장을 했다. 때문에 오케스트라 음악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드는지 기술적으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즈베덴은 암스텔담의 로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에서 18세부터 악장으로 연주하다 37세에 지휘자의 길을 택했다.
 
지휘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홍콩필 대표인 마이클 맥러드는 “바그너 프로젝트의 취지를 홍콩 사회에 이해시키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였다. 홍콩필은 바그너의 도시인 독일 바이로이트에 사람을 보내서 오케스트라 현악 단원들의 보잉(bowing), 즉 ‘손가락 번호’와 같은 기술을 다 익혀오도록 했다. 성악가는 대부분 바그너 경험이 많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캐스팅했고 합창단은 독일과 라트비아에서 불렀다. 금관악기 연주자 15명도 유럽에서 초청했다.
 
정부가 예산을 지원한 배경은 홍콩이 아시아의 문화 중심지가 돼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맥러드는 “처음엔 홍콩이 바그너를 낯설어 했다. 하지만 관심은 서서히 자라났다”며 “결국에는 이 사회가 음악을 듣는 기준 자체가 올라갔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홍콩필은 단지 연주와 녹음만 한 것이 아니라 ‘니벨룽의 반지’를 어린이용으로 쉽게 풀고, 전시회를 열고 공연 전 강의를 팟캐스트에 올리는 등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신들의 황혼' 공연을 위해 빽빽히 들어선 홍콩필하모닉 단원들과 유럽에서 온 연주자들.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들의 황혼' 공연을 위해 빽빽히 들어선 홍콩필하모닉 단원들과 유럽에서 온 연주자들. [사진 홍콩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클래식의 중심지라 할 수 없지만, 주목도 면에서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오케스트라 홍콩필의 야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맥러드는 “2020년 이후 홍콩에 새로운 콘서트홀이 생길 것이다. 여기에서 ‘니벨룽의 반지’를 나흘 연속 공연하며 전세계 청중을 불러모으는 것이 우리의 더 큰 꿈”이라고 했다. 그는 “미친 아이디어가 가장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즈베덴은 “가장 위험한 짓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홍콩필은 18일 했던 ‘신들의 황혼’ 공연을 21일 다시 한번 6시간 동안 했다. 일요일 오후 3시에 열린 두번째 공연은 2000석 전석 매진됐다.
 
홍콩=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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