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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대신 닭' 찾은 판사 블랙리스트 조사… 법원 분란 더 커져

중앙선데이 2018.01.21 00:18 567호 12면 지면보기
‘판사 블랙리스트’ 추가조사 이번 주 발표
김명수 대법원장이 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이 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과 강제 조사로 인한 법원 내부의 균열이 커지고 있다. ‘판사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이하 추가조사위)는 조사 방법의 위법성 논란을 무릅쓰고 법원행정처 PC 3대에 대한 강제 조사를 벌여 ‘2016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 대응(안)’이라는 문서를 발견했다. 이 사실과 문서의 개요는 지난 16일 경향신문에 흘렀다. 애초 찾으려던 인사 불이익 명단은 나오지 않았지만 행정처가 저지른 또 다른 중대한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의 증거를 찾았다는 취지다. 꿩 대신 닭을 찾은 셈이다. 최근 추가조사위는 법원행정처의 전·현직 심의관들을 경기도 일산 사법연수원에 차려진 조사위 사무실로 불러 문서의 작성 배경과 계획 집행 여부를 조사했다. 추가조사위 관계자는 “조만간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추가조사위, 법원행정처의 인사 불이익 리스트 못 찾아
판사회 의장 선거서 '反 행정처' 후보 낙선 시도 논란 점화

“사실상 블랙리스트”vs "본질과 다른 의혹 제기"
“사태 진정 기회 놓쳐”…대법원장 리더십에 물음표

 
2년 전 중앙지법 의장 선거 논란
2016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는 치열했다. 현행 법원조직법상 각급 법원에 직급별(부장·단독·배석)로 구성되는 판사회의는 법원장의 자문기관에 불과하지만 국제인권법연구회(이하 인권법연구회) 소속 박노수 판사(현 남원지원장)와 정모 판사가 경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다른 법원에 근무하는 고참들이 중앙지법 후배들에게 밥을 사며 선거운동을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동안 각 직급의 최연장자가 의장을 맞는 게 관행이었다. 하지만 2014년 인권법연구회가 의장 후보를 내면서 경선이 시작됐다.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는 대부분 경력 10년이 넘는 중견 판사들인 데다 숫자도 100명이 넘어 법원 내 여론 주도층을 이룬다. 이들의 대표는 법원장의 법원 운영에 입김을 행사한다. 실제로 2014년 인권법연구회 소속으로 의장에 당선된 김모 판사는 법원장의 고유권한인 사무분담권(재판부를 배정하는 권한)을 판사회의와 나누자고 주장하며 법원장과 힘겨루기를 했다. 2016년 박 판사가 후보로 나서자 행정처는 긴장했다. 박 판사는 2015년 양승태 대법원장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박상옥 변호사를 대법관 후보로 제청하자 법원 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19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다”며 반대의사를 밝혔던 인물이다.
 
추가조사위가 발견했다는 문서에는 이 때 법원행정처가 정 판사를 지원하려던 계획이 담겨 있다고 한다. 당시 행정처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정 판사가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있다는 판단이 있었지만 선거 개입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 판사는 이 선거에서 큰 표 차로 당선됐다. 박 판사의 선거를 도왔던 판사 출신 변호사는 “행정처가 어떤 작업을 한다는 소문은 그때 듣지 못했다. 의장을 꼭 선거로 뽑아야 하느냐는 이야기가 행정처에서 나온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박 판사는 의장 임기를 마친 뒤 본인의 희망대로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장으로 부임했다.
 
조사위 문서 성격 놓고 분열
추가조사위가 ‘꿩 대신 닭’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법관 사회는 다시 둘로 갈라지고 있다. 인권법연구회 소속의 한 판사는 “중대한 사법 행정권 남용 행위가 발견된 것이다. 문건 작성 지시는 직권남용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 판사는 “1차 진상조사 결과를 믿었어야 했다. 추가조사위가 조사 목적과 다른 내용으로 법원을 들쑤시고 있다”고 비판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은 지난해 2월 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파견됐던 인권법연구회 소속 이모 판사가 인사 발표 일주일 만에 원대 복귀하면서 불거졌다. 처음에 제기된 의혹은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 행정처 주요 간부가 이 판사에게 판사들의 동향과 성향 파악을 지시하는 부당한 요구를 한 게 인사 번복의 배경이라는 내용이다.
 
지난 4월 경향신문은 진상조사위가 이 판사의 전임자가 사용하던 PC에 대법원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사찰 파일이 있다는 진술을 받고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보도했다.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가 첫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이었다. 며칠 뒤 진상조사위는 “사법 행정권 남용이 일부 확인됐지만 블랙리스트 존재 의혹은 사실무근이다”고 발표했지만 앞선 보도로 커진 불신을 덮진 못했다.
 
결국 지난해 6월 인권법연구회 주도로 열린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재조사를 촉구했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장은 제도 개혁안은 수용하면서도 PC에 대한 강제 조사는 거부했다. “어떤 잘못이 드러난 경우에도 법관이 사용하던 컴퓨터를 동의 없이 조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였다.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 조사는 지난해 9월 취임한 김명수 대법원장의 첫 어젠다가 됐다. 추가조사위에는 양 전 대법원장의 PC 조사 거부에 반발해 사표를 던진 최한돈 인천지법 부장판사 등 인권법연구회의 강경파들이 포함됐다. “당사자 동의 없는 PC 강제 조사는 위법하다”는 법원 내 반대를 무릅쓰고 추가조사위는 PC 3대를 포렌식 업체에 넘겼다.
 
이제 물음표는 강제 조사를 용인한 김 대법원장의 리더십으로 향하고 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판사도 판사를 못 믿는데 누가 재판을 믿겠느냐. 대법원장에게 사태를 방치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김 대법원장과 함께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던 한 변호사는 “사태를 진정 국면으로 이끌 수 있는 기회를 대법원장이 여러 번 놓친 게 아쉽다”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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