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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승진은 이슈, 조선선비 일기 "예조정랑 되니 청탁도"

중앙일보 2018.01.18 14:18
승경도 윤목.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승경도 윤목.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매년 12월과 1월은 인사철이다. 이 맘때 과거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도 승진 등 인사는 최대 관심사였다. 요즘처럼 인사 직후 청탁 문제, 동료 간 갈등까지 빈번이 발생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국학진흥원 7권 조선 선비 일기 분석해
승진·인사, 청탁과 인사 갈등 문제 발표 눈길

한국국학진흥원이 인사철을 맞아 7권의 조선 시대 선비 일기를 분석, 자체 웹진 '담(談)' 통해 조선시대의 승진 등 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발표했다. 
 
놀이판인 종경도.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놀이판인 종경도.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18일 이에 따르면 청대 권상일(1679~1759)은 20세가 되던 1702년 1월 1일부터 1759년 7월 1일까지 57년간 『청대일기』에 다양한 생활상을 매일 기록했다. 
 
일기에서 그는 "예조정랑이 되자마자 청탁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역관과 의학 5~6명이 청탁 편지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과거 시험은 당시 문과와 무과만 있었다. 그런데 기술직 관원인 사역원(司譯院)의 역관, 전의감(典醫監)의 의학, 관상감(觀象監)의 역학은 모두 추천과 소개를 통해 관원을 선발했는데, 그 담당 기관이 예조였다. 요즘의 '취업 청탁'이 있었던 셈이다.  
 
종경도 놀이를 하는 모습.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종경도 놀이를 하는 모습.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인사 대상에 오르다 번번이 떨어진다는 푸념도 있었다. 
 
그는 1719년 7월 22일 일기에 "정기 인사 기간이 됐다. 강진 현감 후보에 올랐지만, 낙점받지 못했다. 다시 성균관에서 몇 개월의 관직 생활을 더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썼다. 그러면서 "여러 달 동안 집을 떠나와서 벼슬살이하면서 고을 수령 자리라도 얻어 부친을 영화롭게 모시려 했지만 지금 또 바람대로 되지 않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다"고 푸념했다. 
 
청대일기.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청대일기.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승진 배경에 의문을 제기하는 듯한 기록도 있다. 
 
사헌부 지평을 지낸 계암 김령(1577~1641)은 27살이 되던 1603년부터 1641년까지 40년간 경북 안동에 살면서 일상을 매일 한지에 기록했다.『계암일록』이다. 
 
김령은 일기에서 "피난하는 임금의 가마를 뒤따른 자들이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썼다. 1624년 1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은 인조반정에서 공훈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위협 요소로 경계하는 조정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껴 난을 일으켰다. 임금 인조는 급기야 파천 길에 올랐는데, 이때 임금을 호위하며 가마를 따른 관리들이 모두 승진했다는 것이다. 그 수가 105명이었다고 그는 일기에 기록했다. 
 
계암일록.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계암일록.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자리를 두고 갈등을 벌인 문제를 고발하는 듯한 내용도 있다. 
 
김령은 1625년 7월 27일 조정의 인사발령 소식을 전해 들었다. 김류와 친한 관리가 대사헌으로, 경쟁 관계인 이귀와 친한 관리는 외직으로 제수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일기에서 "반목이 심하니 장차 조선의 앞날이 어찌될지 심히 걱정이 되는 소식이다"고 썼다. 승진 등 인사에 대한 줄 서기 관행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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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을 위해 전략적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차별을 받던 북쪽 지방 출신이 승진을 하려고 김화(강원도 철원)로 내려왔다는 내용이다. 1712년 3월 19일에서 7월 13일까지 백두산 사계 과정을 일기체로 박권(朴權)이 기록한 『북정일기』에서다. 그는 "김화에서 점심을 먹고, 금성에서 유숙했다. 수령 홍중복과 장령 오우진이 와서 알현하므로 서로 이야기했다. 오우진은 북쪽 출신인데, 김화로 온 것은 승진하려는 목적 때문이다"고 기록했다. 
 
6만8000여 점의 유교책판이 보관돼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서 박순 전임연구위원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배자예부운략 목판'을 살펴보고 있다. 안동=김정석기자

6만8000여 점의 유교책판이 보관돼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서 박순 전임연구위원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배자예부운략 목판'을 살펴보고 있다. 안동=김정석기자

사건과 허물을 사면받아 다시 성주목사로 복직 될 뻔 했으나 아깝게 밀렸다는 내용도 나왔다. 
 
조선시대 관료인 권문해(1534~1591)는 자신의 『초간일기』에서 "1582년 11월 20일 공주목사 재직 시절의 모든 사건과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책임을 벗게 됐다. 성주목사로 다시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추천을 받은 후보자 모두 임금을 모셨던 사람들이다. 결국 가장 첫 번째로 추천을 받은 윤희길이 성주목사가 됐다"고 썼다. 
 
초고속 승진 이야기도 있다. 경상감사를 지낸 조재호(1702~1762)는 1751년 5월 10일 경상감사에 제수받아 1752년 8월 1일 경북 문경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1년 남짓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다.『영영일기』다. 
 
그는 일기에서 "1752년 6월 17일 병조판서에 제수한다는 유지(有旨)가 내려왔는데, 이십일 후인 7월 7일 이조판서로 승진 임명한다는 유지(有旨)가 또 왔다. 두려운 일이다"고 썼다.
 
김민옥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정보센터 박사는 "이 밖에 승진 후 첫 출근에 대한 이야기, 상사의 신임을 받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다는 기록도 여러 개다"며 "그만큼 조선 시대에도 승진 등 인사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고 설명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웹진에 조선 시대 관직 놀이의 놀이판인 종경도(從卿圖)를 공개했다. 종경도 놀이란 놀이판에 관직명을 적어 놓고, 주사위인 윤목(輪木)을 던져 나온 숫자에 따라 말을 이동해 하위직부터 차례로 승진해 고위 관직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안동=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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