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솔직발칙 '여자' 얘기..젊은 다큐 'B급 며느리', '피의 연대기'

중앙일보 2018.01.18 10:41
30대 선호빈 감독이 아내와 어머니의 골이 깊은 고부 갈등을 솔직 발칙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 포스터. 17일 개봉했다. [사진=에스와이코마드]

30대 선호빈 감독이 아내와 어머니의 골이 깊은 고부 갈등을 솔직 발칙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 포스터. 17일 개봉했다. [사진=에스와이코마드]

 생리와 ‘시월드’. 여성이 일생 겪는 대표적 수난사를 각각 30대 시선으로 그린 젊은 다큐멘터리 두 편이 17일과 18일 나란히 개봉했다. 선호빈(37) 감독이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의 고부갈등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져가며 기록한 ‘B급 며느리’, 그리고 김보람(31) 감독이 생리 경력 20년 만에 뒤통수를 맞듯 몸소 깨우치고 경청한 여성들의 고단한 피 흘림의 역사 ‘피의 연대기’다. 각각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꼭 봐야 할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두 다큐 모두 현미경을 들이댄 듯 솔직하게 채집한 지금 여기의 현실에, 발칙하되 공감할 만한 목소리를 실었다. 더구나, 꽤 재미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도 친한 친구의 경험담을 듣듯 흥미롭게 빠져들 수 있는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장담컨대 남성 혹은 미혼 관객도, 보고 나면 자기 일처럼 할 말이 많아질 것이다.  
일명 '생리 다큐'로 통하는 김보람 감독의 '피의 연대기'는 후반 작업 비용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당시 투자자의 40%를 차지할 만큼 젊은 세대 남성들의 지지와 응원이 뜨거웠다. [사진=KT&G 상상마당]

일명 '생리 다큐'로 통하는 김보람 감독의 '피의 연대기'는 후반 작업 비용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당시 투자자의 40%를 차지할 만큼 젊은 세대 남성들의 지지와 응원이 뜨거웠다. [사진=KT&G 상상마당]

 
 “명절 때 시댁에 안 내려갔어요. 그래서 완벽한 명절을 보냈죠.” “어머니, 제가 싫으면 제 아들도 못 봐요.” ‘B급 며느리’는 대한민국 며느리가 짊어져온 모든 억압과 착취에 맞서겠다는 투지의 30대 며느리 진영이 주인공이다. 며느리는 시댁에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 60대 시어머니 경숙에겐 진영의 한 마디,한 마디가 날벼락 같다. 오죽하면 아들에게 다큐 제목을 듣고 “B급이나 돼? F급이야!” 외쳤을까.  
'B급 며느리' 한 장면. 선호빈 감독의 아내 진영은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하는 '돌직구' 며느리다. [사진=에스와이코마드]

'B급 며느리' 한 장면. 선호빈 감독의 아내 진영은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하는 '돌직구' 며느리다. [사진=에스와이코마드]

애초 선호빈 감독이 2013년 8월 카메라를 들게 된 것은 “만날 때마다 바뀌는 시어머니 말을 비디오로 찍어 달라”는 아내의 부탁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안 바뀐다는 체념적인 태도로 적당히 맞춰가며 지내온” 선호빈 감독에겐 괴로운 노릇. 그는 “이렇게 찍은 영상으로 어머니와 진영에게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당사자는 괴롭지만 보는 사람에겐 흥미진진한 신경전이 쌓여갔다. 영상을 본 주변 기혼 감독들의 뜨거운 호응에 다큐로까지 만들게 됐다. 선호빈 감독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지은 별명이 ‘에밀레 다큐’다. 순제작비는 단돈 5000만원. 인신공양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든 에밀레종 전설처럼 자신의 불행을 갈아 넣으면 멋진 다큐 하나 나오겠지, 했단다.  
아내 진영이 "시댁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2013년 이후 선호빈 감독에게 아버지의 생신과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 5월은 전혀 달갑지 않게 됐다. [사진=에스와이코마드]

아내 진영이 "시댁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2013년 이후 선호빈 감독에게 아버지의 생신과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 5월은 전혀 달갑지 않게 됐다. [사진=에스와이코마드]

4년간 촬영한 영상이 무려 700시간 분량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상했다. 다큐 때문에 가족과 “평생 한 것보다 더 많은 대화”를 하며 “장님 코끼리 더듬듯 아내와 어머니의 감정을 따라가는 동안” 선호빈 감독은 어쩐지 혼란스러워졌다. 신혼 때는 누구보다 여렸다는 어머니를, 1차 합격한 사법고시 대신 자신의 헌신적인 아내로 살아가길 택한 진영을 지금처럼 고통 받게 만든 시집살이란 무엇인가. “사실은 한집에 손발 다 움직일 수 있는 어른 넷이 있는데도 어머니랑 나만 밥을 내가 하니, 네가 하니, 그러고 싸우는 게 우스운 거야.” 영화 후반부, 그가 반성하듯 새겨 넣은 아내의 말이다.
며느리와 갈등 때문에 손자를 마음껏 보지 못하는 시어머니 경숙. 그런데, 고부 갈등은 단지 두 사람만의 책임일까. [사진=에스와이코마드]

며느리와 갈등 때문에 손자를 마음껏 보지 못하는 시어머니 경숙. 그런데, 고부 갈등은 단지 두 사람만의 책임일까. [사진=에스와이코마드]

이 영화의 진짜 해피엔딩은 현실에서 찾아왔다. ‘B급 며느리’로 모교인 고려대 출교 사태를 그린 2011년 다큐 ‘레즈’ 이후 7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게 된 선호빈 감독. 그는 지난해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후엔 “백 마디 말로도 안 바뀌던 부모님이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조심스러워졌다”고 귀띔했다. 영화 편집 과정에서 부부싸움 장면을 수도 없이 돌려 보며 우울증까지 왔다는 그는 “생전 처음 심리 상담을 받았는데 아내와 어머니의 관계가 아주 전형적인 고부갈등이란 진단이 왠지 위로가 됐다”고 회상했다. 자신의 불행이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준 것이다. 비슷한 고민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B급 며느리’는 소소한 웃음과 함께 바로 그런 위로를 선사할 다큐다. 
 
자신의 몸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충격으로 첫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연출에 뛰어든 김보람 감독. [사진=KT&G 상상마당]

자신의 몸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충격으로 첫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연출에 뛰어든 김보람 감독. [사진=KT&G 상상마당]

김보람 감독의 ‘피의 연대기’는 일명 ‘생리 위키피디아 다큐’로 통한다. 여성이 한 달에 한 번, 살면서 적어도 400번을 치르지만 늘 ‘그날’ ‘빨간 날’ ‘마술’ 따위로 부르며 쉬쉬해온 그것. 생리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담았다. 한 달에 한 번 피 흘리고도 죽지 않는 여성을 기이하게 여긴 선사시대나 중세시대부터 생리 용품의 안전성과 값비싼 가격이 전세계적 논란을 일으킨 현대까지 동서고금을 아우른다. 
요즘 일회용 생리대 대안으로 주목받는 반영구 생리컵이 무려 1930년대에 미국 가수이자 배우 레오나 차머스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지. 두툼하고 축축한 생리대를 차고 무대를 오를 때마다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생리컵을 발명했다. 반면 1930년 태어난 김보람 감독의 외할머니는 아들 하나, 딸만 일곱을 키우는 내내 무명베에 목화솜을 채운 생리대가 혹여 흘러내릴까, 노심초사했다. 밭일에 바쁜 어머니가 생리대를 던져두고 가면 그걸 빨래하는 건 딸들의 몫이었다.  
1930년대 생리컵 특허를 낸 미국 가수 겸 배우 레오나 차머스. 그는 생리 기간마다 무대에서 겪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리컵을 고안하게 됐다. [사진=KT&G 상상마당]

1930년대 생리컵 특허를 낸 미국 가수 겸 배우 레오나 차머스. 그는 생리 기간마다 무대에서 겪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리컵을 고안하게 됐다. [사진=KT&G 상상마당]

 ‘피의 연대기’에는 여성들조차 몰랐던 내용이 수두룩하지만 결코 어렵지 않다. 여성학 전문가, 30대 직장 여성, 중학교 남학생 등 저마다 다른 세대와 입장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려주며 서로 몰랐던 부분을 채워가는 한 판 수다 같다. 88세 노모와 40~70대 딸들이 추억하듯 돌이킨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국 여성들의 생리에 관한 공감을 나누는 ‘연대(連帶)’기다. 김보람 감독이 직접 고프로(소형 카메라)를 매달고 찍은 생리 주기 때의 일상, 아기자기한 애니메이션이 편안하게 이해를 돕는다.  
'피의 연대기'에는 여성들도 잘 몰랐던 이야기가 적지 않다. 생리 용품의 발전 과정은 생리대가 덜 불쾌하고 덜 흘런내리게 하기 위한 고민의 여정과 같다고 할 만하다. [사진=KT&G 상상마당]

'피의 연대기'에는 여성들도 잘 몰랐던 이야기가 적지 않다. 생리 용품의 발전 과정은 생리대가 덜 불쾌하고 덜 흘런내리게 하기 위한 고민의 여정과 같다고 할 만하다. [사진=KT&G 상상마당]

김보람 감독이 외할머니에게 생리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KT&G 상상마당]

김보람 감독이 외할머니에게 생리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KT&G 상상마당]

 그건 이 다큐의 탄생 배경과 연관이 있다. 한국은 생리용품에서 패드형 생리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김보람 감독도 이를 당연하게 써왔다. 3년 전 동갑내기 네덜란드 친구 샬롯이 “한국은 아직도 그러냐”며 크게 놀라기 전까진 말이다. 네덜란드 여성들은 초경부터 탐폰을 쓴다. 자신을 지킬 방법으로 10대 때 자궁 내 피임 시술을 받는 여성도 적지 않다. 김보람 감독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충격을 받았어요. 생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튜브에 이미 생리에 관한 어마어마한 분량의 정보와 논쟁이 오가고 있음을 안 그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생애 첫 다큐 연출에 뛰어들었다. 자신처럼 “내 몸에 대해 잘 몰랐던” 여성들이 “더 자유롭게 피 흘릴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0~20대에 이런 사실들을 알았다면 내 몸을 위해 해온 많은 선택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이 다큐가 그 변화를 위한 재미있고 편안한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고 했다.  
김보람 감독은 생리에 대해 달라진 인식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꿔놨다고 말했다. [사진=KT&G 상상마당]

김보람 감독은 생리에 대해 달라진 인식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꿔놨다고 말했다. [사진=KT&G 상상마당]

다큐를 위해 인터뷰와 자료 조사를 해나가며 김보람 감독은“우리 사회가 생리혈을 터부시하는 건 생리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변화의 여지는 충분하다. 요즘은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생리에 관한 정보를 더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분위기다. 남성들도 바뀌고 있다. 일례로 ‘피의 연대기’의 후반 작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크라우드펀딩에서 투자자의 40%가 자신의 여자 친구나 아내, 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나선 남성들이었다.  
김보람 감독은 말한다. “해외에서는 생리로 인한 통증의 심각성도 많이 논의되고 있어요. 여성 감독 다이애나 파비아노바가 자신의 생리 전 증후군을 그린 2009년 다큐 ‘더 문 인사이드 유(The Moon Inside You)’도 인상 깊게 봤습니다. 한국에서도 여성의 몸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피의 연대기’가 그 작은 발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