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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어게인 1987’이 안 되려면

중앙일보 2018.01.18 01:45 종합 34면 지면보기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2016년 이맘때 서울 서초동의 한 중국집에서 홍강철(45)씨를 만났다. 2014년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홍보한 ‘보위부 직파 간첩’ 사건의 주인공이다. 허위 자백에 따른 기소라는 이유로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2심 선고를 앞둔 상태였다. 고량주 몇 잔을 거푸 들이켠 뒤 지난 일을 떠올렸다. 함경북도 무산에서 탈북 희망자들의 도강을 돕던 일, 그 ‘생업’이 들통나 가족을 두고 떠나던 날의 기억.
 
2013년 입국 뒤 84일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의 독방에 갇힌 채 국정원 대공수사팀에 자백을 강요당한 그는 열두 번의 신문 끝에 그들이 원하는 ‘스토리’를 토해냈다. 그 후 “가족을 데려와 준다”는 약속은 사라졌고, 검찰은 국정원이 써준 대로 구속기소했다. 변호사를 만나게 된 건 검찰로 넘겨진 뒤였다. 2심도 무죄였지만 재판은 검찰의 상고로 계속되고 있다. “어긴 것은 북한법이지 남한법이 아닌데…”라던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홍씨 사건은 유우성 사건과 더불어 탈북자를 회유해 간첩을 만드는 데 급급했던 국정원 대공수사의 폐단과 거기에 기대 온 검찰의 수준이 드러난 대표적 사례다. 그 때문에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빼앗아 경찰에 주겠다는 조국 민정수석의 발표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 찰나 영화 ‘1987’이 떠올랐다. 청와대의 구상대로라면 경찰은 다시 간첩 수사의 시작과 끝을 스스로 정하게 된다.
 
간첩을 ‘양산’했던 그 시절의 경찰과 지금의 경찰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몇 년 새 귀를 스쳤던 경찰의 부적절한 사건 처리들이 떠올랐다. “검사에게는 욕설 정도 들어봤지만 경찰에게는 맞은 적도 있다”는 한 변호사의 체험담도 기억났다. 수사권을 이리저리 옮겨 붙여 권력 남용을 막겠다는 떠들썩한 논의 속에 큰 구멍이 있는 게 아닐까.
 
지난해 12월 28일 헌법재판소는 재판 과정에서 수사 기록 일부를 내놓지 않는 검사의 행위가 당사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결정했다. 반복되는 위헌 결정에도 고쳐지지 않는 검찰의 악습이다. 기소 전이거나 기소유예라도 한 뒤라면 피의자의 방어권은 더 쉽게 무시된다. 경찰의 피의자 신문에는 변호사가 참여하는 사건이 전체의 0.1%라니 더 말할 게 없다.
 
하지만 정작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 논의는 진전이 없다. 수사 단계에서 경제적 여력이 없는 피의자에게 국가가 변호인을 지원한다는 ‘형사공공변호인제’ 논의에선 변호사 업계와 정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마찰음만 계속된다.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였다. 피의자의 방어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검사나 경찰관 이야기도 아직 들리지 않는다.
 
임장혁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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