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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퍼스펙티브] 문 대통령, 원전 수출 전선에서 탈원전 모순 느껴보라

중앙일보 2018.01.18 00:31 종합 30면 지면보기
67일간 한국·UAE 불화 사건의 교훈 
UAE의 칼둔 아부다비 행정청장이 지난 9일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UAE의 칼둔 아부다비 행정청장이 지난 9일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일을 만나 의외의 도움을 받을 때가 있다. 당장 이익이 안 되더라도 평소 주변에 친절을 베풀고 신뢰를 쌓아 둔 사람들이 누리는 행운이다. 나라 간에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처칠은 “외교는 어려울 때를 대비해 친구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3일 송영무 국방장관의 방문에서 시작돼 올해 1월 9일 문재인 대통령과 칼둔(42) 아부다비 행정청장의 면담으로 봉합된 ‘67일간 한국·아랍에미리트(UAE) 불화 사건’은 친구 만들기라는 외교의 본질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사우디 30대 군주 빈 살만을 잡아라
2030년까지 원전 100조 시장 개막
UAE의 빈 자이드 왕세제가 도울 것
제국주의 냄새나는 중국보다 유리

임종석·김성태 의미 있는 비밀 대화
“중동 정상외교 상반기 가능할 듯
탈원전도 국민 안심 원전으로 전환”

외교는 위기 대비해 친구 사귀는 것
중동 군사기지, 철새의 쉼터 같은 곳
원전 진출로 국제 전략 무대에 등장

애초에 원전 수출과 패키지로 맺은 군사협정에서 한국이 손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일부 발견됐다고 느닷없이 상대국으로 날아가 8년 된 조항을 바꾸자고 생떼를 쓴 것부터 잘못됐다. UAE는 격노했다. 혁명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정권이 교체됐다고 국가 간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그 나라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57) 왕세제는 “한국의 대통령이 직접 와서 해명하지 않으면 단교(斷交)도 불사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에 놀라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황급히 아부다비를 방문해 “군사협정 수정 문제는 없던 거로 하겠다”고 자세를 낮췄다. 칼둔은 서울 답방에서 “실질적인 군사협력을 더 증진시키자”고 밀어붙였다. ‘나는 손톱만큼도 손해 볼 수 없다’는 이기적인 태도로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없다.
 
그래도 불화 사건의 마지막이 웃는 장면이었던 건 불행 중 다행이다. 칼둔은 “우리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는 가톨릭식으로 결혼했다”라고 했으며, 문 대통령은 “양국이 형제 국가 관계로 발전하길 바란다. 뜨겁게 사랑하자”고 화답했다. 절교할 뻔하다 관계가 더 깊어진 친구 같은 모양새가 꾸며졌다. 칼둔은 “아랍 속담에 좋지 않은 것도 좋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동조했다.
 
칼둔 청장은 문 대통령이 UAE에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는 왕세제의 친서를 갖고 왔다. 대통령의 방문 시기는 의전과 모양을 따지면 UAE 원전 1호기 준공식이 있는 연말이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불화를 겨우 벗어나고 있는 두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을 고려해 빠를수록 좋다는 쪽이 힘을 얻고 있다. 정상회담 시기를 하루라도 당겨 이른바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전략적 동반관계’를 확정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UAE 방문으로 ‘국내에선 탈원전, 해외엔 원전 수출’이라는 이중적인 분열 정책이 자연스럽게 교정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지난해 하반기 UAE에 출장 간 문미옥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이나 영국에 원전을 수주하러 간 백운규 산업자원부 장관의 ‘속은 싫은데 겉으로 좋은 척’하는 표정·언행들이 구설에 올랐다. 우리 원전의 가치와 기술을 자랑하면서도 “한국 내에선 밀집 건설된 원전의 위험성 때문에 탈원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앞뒤 안 맞는 발언이 국민을 실망하게 하고 외국인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괴상한 상황은 문 대통령이 직접 수출 전선에 나가 한국형 원전을 세일즈하면서 탈원전의 모순을 느껴봐야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질 것이다.
 
12일 비밀대화를 나눈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오른쪽)과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연합뉴스]

12일 비밀대화를 나눈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오른쪽)과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연합뉴스]

한국과 UAE 불화 사건이 봉합된 직후인 지난 12일, 임종석 비서실장은 칼둔의 방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를 만났다. 핵심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다. 알려진 대화만 음미해도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김 대표는 기자와 통화에서 “임 실장으로부터 문 대통령이 연말이 아니라 이른 시기에, 상반기 중에라도 UAE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며 “대통령이 이번에 가면 무함마드 왕세제와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도 같이 방문할 것 같다. 100조원 규모의 사우디 원전을 수주하는 데 UAE가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했다더라”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는 임 실장한테 들은 얘기와 자기가 느낀 바를 정치적으로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직설적인 발언은 안 하려 했다. 그러나 청와대가 탈원전 정책을 끝까지 고집할 수 없으리라는 인상은 확실히 받았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의 사람들이 여기서 한 말 다르고 저기서 한 말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는데 김 대표도 거기에 넘어간 것 아닌가.
“임 실장과 1시간 반이나 얘기했다. 내가 속았는지 안 속았는지는 앞으로 문 대통령과 임 실장의 행동을 보면 알 것이다. 이번 UAE와 불화 사건을 수습하면서 두 사람이 엄중하게 깨달은 바가 있는 것 같더라. 나는 이 정부가 탈원전을 포기하고 국민 안심 원전으로 정책을 바꾸도록 하는 데 정치적 명운을 걸겠다.”
 
두 사람이 회동 뒤 발표한 임종석-김성태 합의문을 찾아보니 ①항은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원전 정책으로 해외 원전 수주에 함께 협력하기로 했다’, ②항은 ‘국가 간 신뢰와 외교적 국익을 위해서는 정부 간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였다. 이에 대해 김 원내대표는 ①항의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원전 정책’은 임 실장의 용어인데 탈원전 정책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고, ②항은 UAE 사태가 과거와 현재 ‘정부 간 연속성’을 무시하는 바람에 발생한 참사라는 깨달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와대 기류가 당장 국내 탈원전의 포기까지 안 가더라도 해외 원전 수출 쪽으로는 망설임 없이 올인하겠다는 자세로 전환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놀라운 뉴스다. 여간 반갑지 않다. 내적인 모순이 깨끗이 해소되지 않더라도 한쪽(원전 수출)에 힘이 적극적으로 실리면 다른 쪽(탈원전)은 찌그러지기 마련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33)와 무함마드 빈 자이드 UAE 왕세제(57·아래)는 가족같은 사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33)와 무함마드 빈 자이드 UAE 왕세제(57·아래)는 가족같은 사이다.

문 대통령이 UAE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왕세제와 정상회담을 한 뒤 그와 함께 인접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넘어가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33) 왕세자와 만난다는 구상은 흥미진진하다. 프랑스와 경쟁 끝에 UAE를 중동 최초의 원전 국가로 만든 한국이 그 지역 패권국의 하나인 사우디에까지 원전 진출 가능성을 높이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패권국 이란과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는 사우디에 원전이 들어서는 건 에너지 공급 이상의 의미를 띠게 된다. 동방의 중견국 한국이 이역만리 서남아시아의 전략적 무대에 등장하는 신호다.
 
정상을 통해 또 다른 정상을 소개받는 외교 관계는 드문 사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아랍 인종과 무슬림 종교라는 동질적인 역사·문화를 공유하는 UAE·사우디아라비아·바레인·쿠웨이트 4개국끼리는 가능하다고 본다. 4개국은 신정국가 형태인 이란·이라크·시리아와 달리 서구적인 현대 무슬림 국가를 지향한다.
 
이 중 가장 먼저 깬 UAE의 무함마드 왕세제가 4개국 실권자들의 맏형 혹은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UAE는 한국형 원전을 ①합리적인 가격 ②빈틈없이 지켜지는 공기(工期) ③최고 수준의 품질(90%대 수준의 가동률) ④사막 최초로 성공한 건설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도 공사에 직간접, 국내외적으로 참여한 수백 개 기업, 수만 명 인력이 누구도 손해 보거나 철수하지 않은 전형적인 윈윈 사업이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33·사진 위)와 무함마드 빈 자이드 UAE 왕세제(57)는 가족같은 사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33·사진 위)와 무함마드 빈 자이드 UAE 왕세제(57)는 가족같은 사이다.

한편, 사우디는 지난해 말 20조원 규모의 1400㎿짜리 원전 2기를 국제 입찰에 부쳐 한국을 비롯한 미국·중국·러시아·프랑스 5개국으로부터 입찰 의향서를 받았다. 오는 4월 2~3개국을 우선 협상국으로 고르고 올해 말까지 최종 결정을 내린다는 스케줄이다. 실질적 경쟁국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로 압축되고 있다. 아랍 사람들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중동을 혼란에 빠뜨렸던 제국주의에 본능적 반감이 있다. 이런 정치 문화적인 성향이 제국주의 냄새가 나는 중국보다 한국에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카리스마 넘치는 30대의 개혁 군주다. 석유 시대의 종말을 대비해 원전과 신재생 에너지의 청정 국가로 탈바꿈하기로 작심했다. 560조원을 투입해 홍해 연안에 서울 면적의 44배 되는 디지털 사막 도시를 만들겠다는 야망을 표출했다. 디지털 사막 도시에 근원적으로 필요한 인프라가 에너지 발전소다. 발주된 사우디 원전 2기만 올해 한국이 수주하면 2030년까지 이어질 20여기의 대형 상업용, 중소형 스마트 원전을 차례차례 따낼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100조원 규모. 어마어마한 일자리의 보고다. 문재인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 사우디의 빈 살만 왕세자를 감동하게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세계의 화약고라는 중동의 원전 진출에 대해 한국인이 갖는 편견 중의 하나가 경제 이익을 위해 군사를 손해 볼 것이라는 감정이다. 수십조원 국익이 걸렸어도 우리 젊은이의 피 한 방울이 더 중요하다는 감상도 흐른다. UAE에 나가 있는 150여명의 아크 부대 특전사 요원들이 한국의 안보를 팽개치고 그 나라 용병으로 고용됐다는 오해도 여전하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한국이 원전을 위해 군사를 희생시킨 적은 없다. 원전과 군사, 양쪽에서 모두 윈윈했다.
 
한국이 서남아시아에 확보한 자체 군사 기지는 망망대해를 날아가는 철새들이 쉼터로 이용하는 바위섬과 같다. 2011년 소말리아 해적들이 석해균 선장의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한국 정부는 테러범을 소탕한 뒤 생포한 해적 5명을 서울로 신속히 송환해야 하는 외교 난제에 부딪혔다. 그때 한국 군대가 주둔한 UAE의 무함마드 왕세제가 아무 조건 없이 왕실 전용기를 내줬다. 이른바 오만의 살랄라 공항 압송작전이다.
 
서정민 한국외대 교수(중동학)는 “자기들 전용기를 내어 준 UAE 왕실의 결단은 한국이 원전 수출과 패키지로 맺은 군사협정에 따라 아크 부대를 파병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서 교수는 “한쪽이 이익이면 상대편은 반드시 손해라는 제로섬 사고방식에 사로잡히면 해외 군사 주둔의 이익과 실체를 보기 어렵다. 양쪽이 모두 윈윈하는 포지티브섬 현상은 친한 친구나 우호적 나라 간 외교에서 자주 발견된다”라고 말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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