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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글로벌 한국기업, ‘정권 포비아’ 떨쳐야

중앙일보 2018.01.16 01:52 종합 30면 지면보기
심재우 뉴욕특파원

심재우 뉴욕특파원

2015년 1월이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구속된 이후 사실상 그룹을 이끌던 이미경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단독 보도했었다. 이 부회장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고, 특히 어머니 손복남 고문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사실을 CJ 안팎에서 확인했다.
 
지금 와서 보니 이 부회장 사퇴의 핵심은 권력이었다. 지난 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에서 이 부회장 사퇴에 대한 내막이 밝혀졌다. 손경식 CJ 회장이 지난해 최순실 청문회에서 했던 발언을 좀 더 구체화해 법정 증언했다. “2013년 7월 5일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VIP(박근혜 대통령) 뜻이니 이미경 부회장이 경영에서 손 떼게 하라’고 말했다.”
 
결국 손 회장과 조 수석의 면담 이후 이 부회장은 2014년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변호인’ 등 좌파적 시각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 돈벌이했다는 게 청와대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이유로 지목됐다. CJ 주식 한 장 없는 권력이 기업체 고위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일이 보란 듯이 자행된 것이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 같은 만행을 지시했다면 그 기업의 주주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 최대 차량공유업체 우버의 설립자 트래비스 캘러닉이 물러나는 과정을 보면 철저하게 자본게임이었다. 지난해 말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가 10조원을 들여 우버의 최대주주 자리에 올라서는 동시에 캘러닉이 갖고 있던 지분 가운데 상당량을 사들이면서 사실상 경영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성추문 은폐, 기술 유출 파문, 배임소송 등에 휘말렸던 캘러닉 또한 좋은 가격을 받고 물러날 수 있기에 거래가 성사될 수 있었다.
 
전기차업체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 미국을 대표하는 제약회사 머크의 CEO 케네스 프레이저가 트럼프 대통령과 뜻을 같이할 수 없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발표해도 백악관이 이들의 자리를 흔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순전히 해당 기업 이사회가 주주들의 의견을 반영해 이들의 진퇴를 결정할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뒤에도 기업들은 여전히 저자세다. 지난주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서 만난 중소기업인의 전언이다. “삼성이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세탁기 공장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테이프 커팅 기념행사를 조용히 진행했다. 청와대로부터 일자리를 미국으로 옮겼다는 지적을 받을까 봐 노심초사 끝에 내린 결정이라더라.”
 
올해 CES 행사장은 세계 1등으로 도약하려는 중국 기업들의 파이팅으로 넘쳤다. ‘정권 포비아(공포증)’에 발목 잡힌 우리 기업들이 곧 중국에 따라잡힐까 걱정된 CES였다.
 
심재우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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