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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영의 호모디지쿠스] 급식체·야민정음·초성놀이 … 스마트폰 장악한 ‘언어 유희’

중앙일보 2018.01.13 00:02 종합 18면 지면보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넋빠진 사람처럼 걷는 사람들을 흡사 좀비와 같다고 해서 ‘스몸비(smombie)’라고 한다. 스마트폰속 드라마와 채팅에 빠져서 그렇기도 하지만, 작은 글씨가 안 보이다 보니 눈은 점점 더 작은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손에 쥐기도 불편한 큰 화면의 스마트폰이 예상외로 잘 팔리는 것은 스마트폰의 멀티미디어 기능과 함께 노안세대들이 많아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어쩌다 인간이 30cm 앞 5인치도 안되는 작은 화면에 세상을 묻어버렸을까? 그 작은 화면에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일상이 됐다. 중국이나 일본 사람이 휴대폰으로 문자를 입력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속으로 ‘아! 세종대왕님’을 외칠 수 밖에 없다. 자기나라 말을 로마자로 바꿔 병음으로 입력해야 하는 그들에 비하면 우리나라 한글자판은 얼마나 편한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그야말로 ‘갓세종’ 위대한 왕이시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세종대왕님이 화내실지 웃으실지 모르는 새로운 방식의 글자 문화가 생겨났다. 이른바 세종대왕님의 훈민정음에 빗대 만든 야민정음이다. 야민정음은 야구갤러리에서 만든 훈민정음이라는 뜻으로 모양이 비슷한 글자를 바꿔쓰는 놀이다. 그런데 놀이로서가 아니라 실제 작은 글자를 읽다보면 그렇게 혼동이 되는 글자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명작영화는 ‘띵작영화’가 되고 귀빈은 ‘커빈’, 대나무는 ‘머나무’ 등으로 바뀐다. 이 방식으로 만들면 개그맨 박명수는 ‘박띵수’로 네이버는 ‘비이버’로 라면은 ‘라
 
 
’이 된다. 글자 모양이 얼핏 비슷해 보이는 글자로 대체하는 이 놀이는 흔히 뜻이나 발음을 갖고 노는 말장난이 아니라 글자의 모양을 바꾸는 스마트폰 시대의 놀이다.
 
이런 놀이는 점차 발전해서 가로를 세로로 바꿔서 만들기도 한다. 만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호옹이’는 원래 비명소리 ‘으아아아’를 세로로 세워서 읽은 것이다. 이렇게 착안해서 ‘ㄸ뚜ㅁ뜨뜨’를 세로로 읽으면 비빔밥이 된다. ‘J뚜0묘으’는 이명박, ‘버0’은 똥이다. 이 분야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유명한 단어는 ‘KIN’이다. 옆으로 읽으면 즐이라는 글자가 된다. ‘즐’은 원래 ‘즐거운 시간 되세요’라는 뜻의 줄임말인데 실제로는 ‘더이상 볼일 없으니 그만 꺼지라’는 냉소적인 은어다.
 
다만 이런 시각적 변형놀이는 하나의 법칙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변형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에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인 ‘밈(Meme)’이 되어 인터넷 공간에서 인터넷 은어로서 살아남는다. 바이러스가 스스로는 복제를 못하지만 숙주를 만나면 생물처럼 번식하듯이 인터넷 은어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변형으로 만들어진 생존물중 하나가 급식체다.
 
급식체는 주로 급식을 하는 중고등학생들이 쓰는 언어라는 뜻으로 축약어, 합성어, 외래어 등으로 이뤄진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초성어. 초성단어만 찍어서 실제 의미를 짐작하게 만드는 것인데, ‘ㄱㅇㄷ(개이득)’, ‘ㅇㅈㄱ(인정각)’, ‘ㅇㄱㄹㅇ(이거레알? : 진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파격적인 장난들을 보다 보면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언어파괴, 한글오염 등의 말이 나올만 하다.
 
하지만 이를 두고 ‘언어오염’ 운운하면 더 유치한 꼰대질이 된다. 대부분 인터넷 특유의 놀이 문화 범주안에서만 키득거리고 넘어갈 뿐 현실로 넘어오진 않는다. 그런데 한 국회의원이 쏟아지는 문자폭탄에 스트레스를 받아 ‘ㅁㅊㅅㄲ’, ‘ㅅㄱㅂㅊ’라고 보낸 초성문자 메시지가 크게 논란이 됐다. 사과는 했지만 초성놀이는 한동안 불이 붙어 계속됐다.
 
세종대왕님이 만든 한글이, 5인치 크기의 작은 휴대폰 화면속에서, 우리의 문화와 정치, 언어와 소통방식을 바꾸고 있다. 받아들이면 놀이처럼 재미있지만, 맞부딪치면 꼰대가 되거나 바보가 된다. 스마트폰 시대다. 
 
임문영 인터넷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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