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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법은 언제 종교에서 갈라져 나왔나

중앙일보 2018.01.13 00:02 종합 21면 지면보기
법으로 읽는 유럽사

법으로 읽는 유럽사

법으로 읽는 유럽사
한동일 지음, 글항아리

고대부터 근대까지 유럽사 훑어
법은 한 시대의 정신적 나침반
로마법과 교회법의 갈등 주목
역사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어

 
“정복당한 그리스가 야만적인 승리자를 정복했다”라고 쓴 이는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였다. 여기에서 야만적인 승리자는 당연히 로마를 가리킨다. 로마는 정치적으로 그리스를 정복했으나, 로마의 문화 중심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 것은 오히려 그리스였다. 진정한 정복자는 로마가 아니라 그리스였던 셈이다. 정복자가 매양 정복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역사는 얼마나 단순하고 지루했을 것인가? 역사의 길을 굽이굽이 더듬어 돌다 보면, 수많은 우호적 혹은 비우호적 상호작용을 만난다. 거기에는 단순한 승패도 없고 단순한 정복도 없으며 단순한 계승도 없다. 탁월한 역사서는 어머니가 아들을 낳았다고만 쓰지 않는다. 아들 안에 있는 어머니, 어머니 안에 있는 아들 그 모두를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새해 벽두 이런 세심한 미덕을 지닌 책을 만날 수 있으니 진정 기쁘다. 교회 법학 및 로마법의 전문가인 한동일 선생이 낸 두툼한 법학 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법으로 읽는 유럽사』라는 제목의 이 책은 그러니까 유럽의 역사를 법의 변천 과정을 통해 짚어나가는 대담한 모험이다. 그는 로마법, 교회법, 그리고 보통법(공통법)의 본질과 그 형성 과정에 대한 논의를 통해 고대에서부터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흐르는 유럽의 역사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법이야말로 한 시대의 공동체가 품고 있는 정신적 지향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다고 볼 때, 이 책은 유럽에 대한 탁월한 사회사이자 문화사이고 또한 정치사이다. 우리는 로마법, 교회법, 그리고 보통법에 대한 저자의 상세하고도 대담한 설명 그리고 많은 흥미로운 사료들에 매료된다. 그러나 이 책의 참된 미덕은 시대를 달리하는 상이한 법체계 사이의 복잡하고도 흥미로운 상호 관계에 대해 저자가 내놓는 역동적 설명에 있다. 그가 그려낸 로마법에는 교회법이 살아 숨 쉬고 있고 그가 설명하는 교회법에는 로마법의 자취가 또렷하다. 또한 로마법과 교회법이 보통법의 우산 아래 동거하게 되는 양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레바논에 있는 레 체드레 수도원 전경. 동방의 수도원은 유럽 교회에 영향을 끼쳤고, 결국 유럽의 법률·종교·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사진 글항아리]

레바논에 있는 레 체드레 수도원 전경. 동방의 수도원은 유럽 교회에 영향을 끼쳤고, 결국 유럽의 법률·종교·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사진 글항아리]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책은 ‘유럽사로 읽는 법’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법은 종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려는 장구하고도 치열한 과정을 통해서 천천히 자신을 형성해왔다. 따라서 이 책은 법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천착이기도 하다. 과연 이 책에는 ‘세계의 기원, 서양 법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야심만만한 부제가 붙어 있다.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앞에 놓여있는 이들은 로마법과 교회법 내부에서 이루어진 치열한 역사적 분화 과정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이 책의 발간을 몹시 반길 수밖에 없다.
 
저자와 함께 국경과 시대와 언어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울고 웃다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우리는 이 장대한 스토리의 앞과 뒤, 그 너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유럽에서 법의 시작은? 로마법과 고대 그리스 법체계와의 관계는? 보통법을 사라지게 한 세속주의의 기원은? 현대 세속주의의 향배는? 보통법의 귀환을 진단케 하는 현대의 여러 징후에 대한 해석은? 이런 질문들을 간직하며 저자의 다음 저서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법으로 읽는 유럽사』, 짐작하시겠지만 쉬운 책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난해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과 법학과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럽의 수많은 정신적 유산들을 부지런히 호출하는 저자의 지적 성실함에서 오는 것이다. 저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교향곡이 짧고 단순한 동요보다 난해하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저자의 지적 여정을 따라가는 일은 아름다운 보석들을 화려하게 진열한 예쁜 가게들 사이를 걷는 일처럼 눈부시고 흥미로우며 짜릿하다. 작년 많은 인문 독자들을 매혹했던 그의 책 『라틴어 수업』의 제6장은 “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 그러니까 “매우 우수함” 혹은 “매우 탁월함”이라는 라틴어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결례가 아니라면, 올해의 시작을 아름답게 장식한 저자의 이 책에 이 말을 다시 돌려드린다. 숨마 쿰 라우데!
 
김수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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