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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이방카와 김여정의 ‘평창 만남’을 꿈꾸다

중앙일보 2018.01.12 01:39 종합 31면 지면보기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이방카와 김여정, 두 사람이 평창에서 조우할 수 있다는 추측성 보도를 접했을 때 사실과 허구를 그럴듯하게 버무린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녀로 백악관 선임고문인 이방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으로 당 정치국 후보위원인 김여정…. 두 여성 실세의 만남 가능성은 희박하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전쟁 위기가 감도는 한국에 자신의 혈육을 보내는 건 도박에 가깝다. 그런데 이 허무맹랑한 허구가 조금씩 사실의 틀을 쌓고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 혈육이자 실세
동맹의 상징으로 이방카 보내고
평화 진정성 차원 김여정 파견해
두 여성이 ‘올리브 가지’ 나누면
평화 향한 세기적 기적 만들 수도

단초는 트럼프가 던졌다. 그는 4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평창 겨울올림픽에 가족을 포함한 고위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했는데, ‘가족’이라는 표현을 썼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 내외가 대표단을 이끌기로 했지만 가족은 미정이다. 트럼프가 이방카를 대표단 일원으로 파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이방카의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나는 이방카의 평창 방문을 고대한다. 이방카는 한·미 동맹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평창은 남북이 총포로 대치하는 비무장지대(DMZ)에서 불과 수십㎞ 떨어진 곳이다. 사랑하는 맏딸을 이런 위험 지역에 내보내는 행위보다 동맹을 과시하는 강렬한 제스처가 또 있을까.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나 일본의 아베 총리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민에 대한 트럼프의 성의는 돋보일 것이다.
 
이방카는 반전의 카드다. 북한에 쏠릴 스포트라이트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방카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1500만여 명의 팔로어를 둔 셀럽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일본 방문에서 본 ‘이방카 열풍’은 그의 ‘상품성’을 입증했다. 돈·외모·권력을 다 가진 이방카의 스타성을 감안할 때 북한의 선전·선동은 빛이 바랠 수 있다. 평창의 이방카를 북한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동족의 경사(평창올림픽)를 같이 기뻐하고 서로 도와주는 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 선수단 외에도 고위급 대표단, 응원단, 예술단 등을 보내기로 했다. ‘고위급 대표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의 뜻이 담긴 만큼 무게감 있는 핵심 실세를 보낼 개연성이 높다. 최용해 노동당 부위원장 등 단장이 누가 되든 관심은 김여정에게 쏠린다. 김정은의 아내 리설주가 학생 시절인 2005년 9월 인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응원단으로 온 적이 있다. 김여정이 한국에 못 올 이유는 없다.
 
고대훈칼럼

고대훈칼럼

30대의 이방카와 김여정은 정치적으로 유사한 길을 걷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마이클 울프의 책 『화염과 분노』엔 “첫 여성 미국 대통령은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자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이방카는 품게 됐다”는 대목이 있다. 부시 부자가 대를 이어 대통령에 올랐고, 클린턴에 이어 힐러리가 부부 대통령의 문턱까지 간 전례를 보면 이방카의 앞날은 예측할 수 없다. 김여정은 ‘남매 정치’ ‘김정은 후계자’란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정치적 위상이 크게 강화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김정은이 여동생(김여정)을 가족 왕조의 후계자(next heir)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북한의 본심은 의심받고 있다. 외세 배격과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운 위장 평화 공세를 통해 한·미 동맹의 분열을 꾀하고, 압박과 제재를 피하려는 교란작전이라는 부정적 시선이 있다. 매번 그들에게 놀아났다는 씁쓸한 과거의 기억은 이런 의혹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올림픽이 끝나면 속임수가 드러날 것”(폼페이오 미 CIA 국장)이라는 경계의 목소리를 북한은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북남 관계를 개선해 뜻깊은 올해를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적인 해로 빛내어야 한다”는 김정은의 다짐만으론 부족하다. 이젠 식상한 메뉴가 된 모란봉악단과 미녀응원단으론 북한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다. ‘백두혈통’ 김여정을 평창에 보내야 하는 이유다.
 
이방카와 김여정에게 평창은 국제적인 인지도와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무대다. 두 여성이 만나 올리브 가지(olive branch)를 나누며 평화와 화해를 호소하는 그림을 상상해 보라. 이런 장면을 연출할 수만 있다면 평창올림픽은 ‘지상 최대의 쇼’가 될 것이다. 당연히 한반도 운전자론도 힘을 얻게 된다.
 
외교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다. 1970년대 탁구공 하나가 미국과 중국의 수교에 물꼬를 튼 것처럼 평창올림픽을 매개로 새 역사를 쓸 수 있다. 꿈꾸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선제적으로 이방카와 김여정을 초청하는 문 대통령의 상상력, 트럼프와 김정은의 통 큰 결단을 기대한다. 그것이 질주하는 전쟁 위기를 멈추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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