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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의 퍼스펙티브] 개헌, 시민이 나설 때다

중앙일보 2018.01.11 00:41 종합 26면 지면보기
개헌 시민회의
프랑스의 사회학자 토크빌이 25살인 1830년 미국 여행을 갔다. 감옥제도를 시찰하려는 목적이었다. 대혁명을 치른 조국 프랑스의 감옥은 처벌 위주였다. 풀려난 전과자는 원한을 갚으려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청년 토크빌은 보스턴에서 출발해 오대호 연안을 거쳐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왔다. 뉴올리언스에서 다시 북상해 워싱턴DC에 도착했다. 그는 교화 위주의 감옥 제도보다 마을 자치에 더 관심이 쏠렸다. 국가의 힘이 압도하는 프랑스인에겐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마을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러 주민들이 회의하는 광경 말이다.

국회발 개헌 시동 걸었으나
정당·정파 이해 엇갈려 난항
시민의 집단 의사와 동떨어진
정치권 주도 개헌은 갈등 유발

성공 입증된 원전 공론화 모델로
개헌 시민회의 통해 개헌안 만들면
사후 갈등 비용을 사전에 줄이고
50년 지속할 헌법 윤곽 가능해져

 
고전이 된 책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은 이렇게 썼다. “민원이 생기면 프랑스인은 중앙정부에 호소하고, 영국인은 지방정부로 가는데, 미국인은 교회에 모여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다.” 토크빌은 이런 습속을 ‘마음의 습관’이라 불렀다. 민주주의의 씨앗이 여기서 발아한다. 마을 자치가 발원지다. 카운티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지도자를 주 정부에 파견하고, 주 정부는 이들을 선발해 연방정부로 보낸다. 자치가 몸에 밴 행정가들이 국가를 견제하는 시민사회의 지킴이가 되는 이유다.
 
정책과 개별 대응의 모순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최저임금 인상의 충격이 일파만파다. 정부의 결단은 정의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시장의 반격은 만만치 않다. 정부가 충격 완화용 지원 조치를 내놓아도 정부 불신의 역효과는 예상보다 크다. 식당과 편의점 알바, 환경미화원, 여타 서비스업 비정규직 고용이 불안해졌다. 인건비 부담에 놀란 업주들이 자기 노동을 늘리거나 기존 일자리를 파트타임으로 쪼개고 있다. 음식값도 오른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주휴수당도 부담이다. 주 15시간 이상 고용된 사람에게 의무 지급해야 하는 1일분의 추가 임금이 주휴수당이다. 사회보험금 부담도 커졌으니 고용주에겐 삼중 부담이다. 한동안 정부 의지와는 반대로 고용 축소가 진행될 전망이다.
 
국가 정책에 대한 개별 대응은 시장의 난맥상을 초래한다. 한국의 최고 부자 동네인 압구정동에서 경비원 94명을 집단 해고한 대응 방식이 그렇다. 환경미화원 노동시간을 두어 개로 쪼개는 사례도 그러하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모두 합리적 대응이다. 비용 절감을 위한 가장 좋은 방안을 선택하는 것이다.
 
임금 인상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30~50인 소사업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격 요건을 맞추려고 정규직 고용을 30인 이하로 줄이고 나머지는 수십 개 파트타임으로 쪼갤 것이다. 이를 손가락질할 수도 없고, 제발 멈추라고 호소해도 소용이 없다. 임금 주고 세금 내는 데 지쳤다는 점주를 어떻게 나무랄 수 있는가.
 
개별 대응의 집합적 효과는 곧 나타날 것이다. 전국 아파트 경비원 18만 명 중 적어도 1만 명이 해고될 예정이다. 10만 음식·숙박업체에서 생계비를 벌었던 30만 명 중 적어도 10만 명은 줄어든 노동시간표를 통보받을 것이다. 중소기업·자영업 합해 300만 고용주가 선택하는 개별 대응책은 국가 목표인 ‘정의’를 훼손한다. 고용주도 최저임금 인상은 벌써 단행했어야 할 사안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공·사익 간 균열은 어쩔 수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주민자치, 업종별 자치, 또는 시민회의다.
 
주목되는 성북구 모의 시민의회
 
작년 12월 16일, 수은주가 영하 8도로 떨어진 추운 날씨였는데, 성북구 주민자치회의실은 열기로 후끈했다. 성북구청과 징검다리교육공동체가 주관한 ‘아파트 경비원 고용안정 방안’ 자치회의에 주민 80명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최저임금 인상의 충격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가 주제였다. 서울지역 경비원 3만5000명 중 40%가 성북구에 밀집해 있다. 입주자·경비원·경비소장 대표가 각각 입장과 소견을 발표했고 주민들은 경청했다. 회의 초기 주민 반응을 집계했더니 ‘정리해고’ 6명, ‘정부 지원받기’ 8명, ‘대안 마련’ 65명, 기권 1명이었다. 대안 마련에 들어갔다. <사진 참조>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경비원 월급은 220만 원 정도로 오르는데, 월평균 보수 ‘190만원 미만’이라는 정부 지원요건을 상회하는 게 문제였다. 한 주민이 과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경비의 노동 강도가 낮기 때문에 최저임금 대상에서 제외하자!” 점심 후 나른해진 주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감시·단속직인 경비원은 정신적·육체적 피로가 적다는 정부 규정을 바꿔 2015년부터 똑같이 노동법을 적용한 조치에 대한 항의였다. 공장 노동자를 생각했을 것이지만 그것은 묘안은 아니었다. 다시 진지해졌다. 최저임금을 보장하면서 정부 지원을 받는 방법, 이것을 찾아내는 것이 주민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늦은 오후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 결과는 6가지로 집약됐다. 택배·청소를 제외하는 업무 조정, 무급휴가. 직영제를 도입한 근무형태 변경, 일부 감원 후 무인시스템 도입, 전기료 포함 관리비 절감을 통해 인건비 보전 등 다양했다. 그러나 해고를 피하면서 주민 부담을 줄일 방법은 어려웠다.
 
오후 5시, ‘경비원의 근무형태 조정’으로 의견이 수렴됐다. 휴게시간을 보장하고 근로시간을 줄여서 임금 인상에 따른 주민 부담을 경감하는 것. 최종권고안이 작성됐다. “경비원 근무형태를 조정하도록 권고한다. 이를 통해 경비직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떡하든 동행(同行), 어떡해도 동행’ 정신이 발휘됐다. 근무형태 조정은 아파트단지 주민회의의 몫이다. 이른바 주민자치다. 수십 개의 이견이 조율되는 데 하루가 걸렸다. 주민회의가 없었더라면 귀도 기울이지 않았을 의견을 경청했고 그 배경에 놓인 애로를 이해했다. 최종권고안이 최선의 방책이 아니더라도 주민들은 일장 박수로 권고안을 채택했다. 사회적 합의는 이렇게 도출된다. 일단 도출되면 도덕적 설득력을 갖는다. 공익과 사익의 균형을 찾고 갈등을 해결하는 민주적 기제다.
 
이 주민회의를 성사시키는 데에 징검다리교육공동체라는 시민단체의 역할이 주효했다. 이사장직을 맡은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과 성북구 김영배 구청장, 서울대 김의영 교수와 협력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작년 3월부터 주민회의를 위해 동분서주한 곽노현 교수는 그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주민회의 참여자를 공개 모집하는 절차와 사전 의견 수렴을 하는 설문조사가 선관위 규정에 위배됐다. 소요 경비도 문제다. 사전 준비와 전화 접촉, 인건비, 설문조사비, 회의 당일 식사와 참가비(각 2만원 지급)를 충당할 자원이 부족했다. 구청으로부터 주민자치 명목 기본경비를 지원받았지만, 당일 자료 인쇄비가 부족해 다른 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았다고 했다. 만약 주민회의 총경비가 3000만원 정도 들었다면, 그것이 없었을 때 초래될 성북구 경비원 고용 관련 주민 갈등은 수십 배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촉발할 것이다. 주민자치가 비용 절감의 현명한 오솔길이다.
 
시민단체 가입률 OECD 꼴찌
 
작년의 촛불광장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국은 민주주의 선진국’이란 이미지가 널리 홍보됐다. 그런데 ‘마음의 습관’이라는 토크빌의 명제로 돌아가면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초가 허약하기 짝이 없다. 시민단체 가입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다. 2016년 한국사회조사에 따르면 6.4%에 지나지 않는다. 시민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표 1). 영국 성인의 80%, 스웨덴은 90%가 시민 활동을 한다는 1990년대 통계에 비추면 한국사회 저변은 초라하다. 광장에서 연출된 화려한 민주주의는 직장·가정·마을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고소득층·고학력층에서 시민 활동이 훨씬 활발하다. 고졸이 대졸보다 높게 나타나는 것은 노조참여율 때문이지만, 소득과 학력이 낮을수록 시민단체에 신경 쓸 시간이나 경제적 자원이 없다는 뜻이다. 시민단체가 계층 전반의 보편적 이익을 대변하기보다 상위 계층에 편향될 위험이 커진다. 모든 계층의 고른 참여를 격려할 묘책을 짜내야 한다.
 
반면 한국인들은 연고 집단 활동을 열심히 하다. 종친회·동향회·친목회·종교모임·동창회·동호회 등 취미·연고 집단에 64%가 참여한다. 참여율은 소득·학력에 비례한다(표 참조). 한국사회는 연고 네트워크로 작동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지표다. 연고 집단은 ‘우리가 남이냐’는 정서의 발원지다. 인사 비리가 왜 일어나는지, 왜 제3정당이 어려운지를 설명한다. 정부 주도의 적폐 청산은 시민사회의 내적 동학을 수정하지 않고는 지속적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적폐 청산의 주역은 시민들이어야 한다. 시민단체 회원권을 사는 것이 시작이다.
 
시민 주도 개헌 추진해야
 
개헌은 촛불광장의 염원이다. 국회발(發) 개헌이 시동을 걸었으나 정당·정파 간 이해가 엇갈려 난항이다. 개헌의 초점은 무엇이고, 어디까지 개정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지도 헷갈린다. 전문가들도 견해가 달라 개헌의 주요 의제를 확정하는 데에 의견이 분분하다. 제왕적 대통령제 폐기까지는 합의됐다. 대안은 무엇인가. 4년 중임제, 내각제, 현행 제도의 수정·보완, 이원집정부제 간 시민지지율은 각각 25%씩이다. 정부는 4년 중임제를, 국회는 내각제·대통령제가 결합한 유형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든, 정부든 개헌안을 마련해 투표에 부친다면 또 다른 갈등을 초래할 위험이 많다.
 
차제에 ‘개헌 시민회의’를 제안한다. 이미 원전 시민회의가 훌륭하게 이뤄진 바 있다. 그 경험을 보완하면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전국 229개 군·구 단위 시민회의를 열어 2개월 토론하고, 특정 안과 지지 비율을 포함한 최종권고안을 도출하면 좋겠다. 성북구 시민회의가 모범을 보였다. 시민의 집단의사와 동떨어진 채 상정되는 정치권 주도 개헌안이 초래할 사후 갈등 비용을 사전에 줄이고, 적어도 50년 지속할 헌법의 윤곽을 만들 수 있다. 그리되면 2018년은 ‘시민 주도 개헌’의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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