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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뜯기고 학대…결혼사기 당하고도 "좋은 사람" 두둔한 30대 女

중앙일보 2018.01.10 15:38
 지난 12월 10일 경북 울진군의 한 모텔. 7년 만에 가족들과 마주한 30대 여성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결혼을 빌미로 여성들에게 거액을 뜯어낸 가족사기단 김 모(50·여·구속기소) 씨 등 3명 함께 생활하다 탈출한 A씨(32·여)씨였다. 
한겨울인데도 얇은 반소매 차림인 A씨의 몸 곳곳에선 멍 자국이 발견됐다. 일부 상처는 검게 괴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수원지검, 사기 등 혐의로 김모씨 일가족 3명 구속기소
여성 6명에게 결혼 등 빌미로 18억원 뜯어내
피해 여성 한 명은 이들과 함께 도주하며 학대 당하기도
그런데도 "좋은 사람들" 두둔…스톡훌름 증후군 증세
피해 여성 중 1명은 연락두절 상태…검찰 소재파악 중

"그 사기꾼들이랑 살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딸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우는 어머니에게 A씨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엄마. 내 남편이랑 시댁 식구들 좋은 사람들이야."
 
이를 지켜보던 검찰은 심상치 않다고 보고 A씨가 치료를 받도록 했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도 A씨는 "시댁 식구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고 두둔했다.
검찰은 A씨가 스톡홀름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질로 억류된 이들이 인질범을 두둔하는 현상이다. 
검찰 로고. [중앙포토]

검찰 로고. [중앙포토]

1973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4명의 무장강도가 은행에 침입해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6일간 경찰과 대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인질들이 오히려 범인을 두둔하며 경찰에 대항한 데서 유래된 비이성적인 심리현상이다. 
 
여성들에게 거액을 뜯어낸 뒤 달아난 가족 사기단이 검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자신을 재력가로 소개하며 피해 여성들을 속여 돈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피해 여성을 데리고 다니며 학대했다.
 
수원지검 형사4부(서정식 부장검사)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 등 혐의로 김씨와 그의 남편 이모(47)씨를구속기소했다고 10일 밝혔다.
이들은 2011년 1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20~30대 여성 6명에게 결혼을 빌미로 17억9700만원을 뜯어낸 혐의를 받고 있다. 
 
[사진 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사진 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검찰에 따르면 A씨가 김씨 등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11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원 강사로 일하던 A씨는 지인을 통해 김씨의 아들 박모(29·구속기소)씨를 소개받았다. 박씨는 "어머니를 도와 부동산 사업을 한다"며 재력을 과시했다. 둘은 곧 연인으로 발전했고 상견례도 했다. 상견례장에 나타난 김씨와 아버지 이씨는 자신들을 부동산업자와 현직 경찰 간부라고 소개했다. "시집을 오면 딸처럼 대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실상은 계모임 등을 돌아다니며 범행 대상을 물색해 호감을 산 뒤 여성들이 결혼을 결심하면 그때부터 갖은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사기꾼 가족이었다.
실제로 결혼 전부터 박씨 가족은 A씨 가족에게 혼수 비용 등을 이유로 돈을 요구했다. 결혼 후에도 A씨 부모를 찾아가 "재산을 불려주겠다"며 돈을 요구했다. A씨 가족은 이들에게 무려 13억원을 건넸다. 
이들이 계속 돈을 요구하자 수상함을 느낀 A씨 가족은 박씨 가족을 사기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A씨는 이를 취하한 뒤 박씨 가족과 함께 도주했다.
 
이후 A씨의 고난도 시작됐다. 박씨 등은 A씨를 전국으로 끌고 다니며 식당 등에서 강제로 일하도록 한 뒤 그 돈으로 생활했다. A씨가 말을 안 듣는다며 손과 발 등으로 때리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중앙포토]

[중앙포토]

부동산사업을 한다는 박씨는알고 보니 대전의 한 폭력조직의 조직원이었다. 경찰 간부라던 아버지 이씨도 계부였고 전직 경찰이었다.
이들은 피해 여성들에게 화목한 가정인 것처럼 자신들을 꾸며 결혼하도록 한 뒤 돈을 요구해 왔다. 
처음엔 A씨도 이들을 의심했다. 하지만 시어머니 김씨가 "며느리는 시댁에 순종해야 한다"고 세뇌하고 남편 박씨가 "지금까지 천애 고아처럼 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너를 만났다"며 동정심을 유발하자 탈출을 포기했다.
 
A씨가 순종하자 이들은 더 대담해졌다. A씨를 자신들의 범행에 가담시킨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집으로 온 피해 여성이 A씨와 마주치면 "사촌 조카인데 빚이 많아서 내가 데리고 있는 것"이라고 속였다.
지난해 5월에는 박씨가 또 다른 피해자인 B씨(28·여)와 결혼식을 하는 장소에도 A씨를 대동하기도 했다. 이에 B씨는 "A씨도 이들과 한 패"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A씨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B씨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결혼식만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라고 해 그런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일부 피해 여성들이 이들을 고소했지만, "결혼 준비 과정에서 생긴 갈등"이라며 혐의를 부인한 박씨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무혐의 처리되기도 했다.
[사진 Pixabay]

[사진 Pixabay]

그러나 지난해 8월 한 방송사에서 이들의 범죄행각을 취재하면서 전말이 드러났다. 이후 박씨는 저번처럼 무혐의를 기대하며 검찰에 자수했다가구속기소 됐다.
 
박씨가 붙잡히고 자신들은 지명수배되자 김씨 등은 A씨에게 "너 때문에 내 아들이 붙잡혔다"며 둔기를 휘두르는 등 심하게 폭행을 했다. 폭력을 견디다 못한 A씨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달 이들에게서 탈출해 가족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검찰 조사에서도 A씨는 "남편과 시댁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라며 두둔하기만 했다.
검찰은 A씨를 설득해 같은 달 19일 강원도 고성에서 숨어있던 김씨와 이씨를 붙잡았다. 김씨와이씨는 출동한 검찰에 흉기를 휘두르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검찰 조사에서 박씨는 "어머니가 모두 시킨 것"이라고 말하고 계부 이싸는 "나는 밥 먹는 자리로 알고 상견례장에 갔을 뿐 범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는 "A씨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자신과 박씨 등이 한 가족이라는 착각을 해 온 것 같다"며 "A씨 말고도 2013년 C씨(당시 25세·여)가 이들에게 속아 '박씨의 집에서 생활하겠다'며 가족의 품을 떠났는데 아직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어 추적 중"이라고 말했다.
수원=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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