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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무임승차 손님을 태운 운전자가 할 일

중앙일보 2018.01.10 01:33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1998년 2월 14일 이란 테헤란공항에 미국 레슬링 국가대표선수 5명이 입국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란 기자 200명이 몰렸고 이들의 도착 장면은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희망하는 하타미 이란 대통령의 제안이 도화선이 됐다.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국교가 단절된 이후 18년 만의 교류를 미 국무부도 자축했다. 닷새 후 아자드 경기장에 미 선수들이 입장하자 1만2000석을 가득 메운 이란 관중은 기립박수로 환영했다. 동맹국 같았다. 양국 관계가 눈 녹듯 풀리는 듯했다. 그로부터 4개월. 프랑스 월드컵축구 예선에서 맞붙은 미-이란 경기에서 이란이 승리하자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이렇게 외친다. “우린 오늘 밤 오만한 우리의 적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겼다.”
 

중간에 내리지 못하게 관리하면서
요금(대가) 낼 수밖에 없음 설득해야

‘불량국가 외교’의 권위자인 마이클 루빈 예일대 박사(역사학)는 “국제스포츠 이벤트가 적을 친구로 만드는 적은 없다”고 단언한다. 일시적으로 상대 국가 국민의 마음을 녹일 순 있지만 결국은 상대를 적으로 보는 ‘지도자의 리더십’ 때문에 ‘관점’ 자체가 바뀔 순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남북 고위급 회담의 결과는 어떨까. 역사를 돌이켜보자.
 
남북이 첫 단일팀을 구성한 것은 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은 ‘코리아’란 명칭을 썼고,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했다. 북한은 얼마 안 지나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며 핵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2006년 2월 토리노 겨울올림픽. 남북은 협상을 통해 ‘COREA’란 피켓과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했다. 5개월 뒤 북한은 장거리 대포동 2호를 포함해 미사일 7발을 한꺼번에 발사했다. 그리고 석 달 뒤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한마디로 북한에 남한과의 스포츠 대화와 교류는 그저 긴장과 제재의 고삐를 늦추는 수단이었다. 핵 개발 의지를 낮췄거나 늦췄던 역사적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신년사도 마찬가지. 북한은 2015년과 2016년 신년사에서 남북대화 재개 가능성을 언급해 놓고 목함지뢰 도발(2015년), 제4차 핵실험(2016년)을 감행했다. 이란과 마찬가지로 북한 지도자의 리더십은 변하지 않았던 게다.
 
“100% 지지한다”는 미국의 변신에 너무 기대를 갖는 것도 금물이다. 기본적으로 트럼프는 ‘자랑쟁이’다. 뭐든 자기 자랑으로만 엮을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레토릭(수사)과 강한 태도가 없었다면 남북대화는 없었을 것이다. 감사한다”고 치켜세운 것은 묘수였다. 당장 트럼프가 “그 봐라. 내 덕분이라잖냐”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불리한 국면이 전개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난 분명 그때 강하게 막았다”고 할 인물이 트럼프다. ‘국제사회 제재’의 틀을 넘어서도 옹호할 것으로 보는 건 순진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이란 하메네이 배신의 교훈은 뿌리 깊다.
 
북한의 노림수는 뻔하다. 한국을 운전석에 앉혀 우쭐하게 만든 뒤 자신은 뒷자리 상석에 앉아 한·미 연합훈련 중단, 핵 보유국 인정이란 목적지까지 ‘무임승차’하려는 것이다. 올림픽은 안전하고 성대하게 성공시켜야 할 잔치지만, 그게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자칫 길 잘못 들었다간 최종 목적지 ‘북한 비핵화’로부터 아득히 멀어질 뿐이다.
 
흥분 가라앉히기, 감언에 넘어가지 않기, 중간에 내리지 못하게 하기, 결국 경찰서(군사행동) 가기 싫으면 요금(비핵화)을 지불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 설득하기. 북한이란 무임승차 손님을 태운 운전자가 할 일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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