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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2616% 오른 베네수엘라 "암호화폐 1억개 발행"

중앙일보 2018.01.09 14:53
마두로 대통령 "암호화폐 1억개 발행" ...대통령까지 나선 암호화폐
노동조합 활동가 출신의 정치인이 세계 최초로 정부가 발행하는 암호화폐 도입을 선언했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56) 대통령이다.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의 파격 실험
'1페트로=원유 1배럴'로 가치 고정

비트코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
블록체인 기술 대신 실물 자산 연계형

베네수엘라 작년 인플레 무려 2616%
경제위기로 정권 불안 커지자 고육지책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 대통령은 최근 대국민 연설을 통해 “오는 14일 암호화폐 1억개를 발행하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암호화폐의 이름은 ‘페트로’다. 암호화폐를 이용해 극심한 경제 위기를 넘어보자는 구상인데, 투자자들의 반응은 썰렁하기만 하다. 로이터통신은 “어떤 투자자가 사려고 할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페트로는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를 자처한다. 하지만 종이나 동전으로 찍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로 닮은 점이 없다. 사람으로 치면 형제는커녕 사돈의 팔촌보다도 더 멀어 보인다.
 
비트코인 이미지 [중앙포토]

비트코인 이미지 [중앙포토]

 
가장 큰 차이점이 실물 자산과 관계다. 비트코인은 금이나 은ㆍ원유 같은 실물 자산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비트코인은 그저 비트코인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비트코인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널뛰기한다.
 
페트로는 전혀 딴판이다. 실물 자산과 묶여 있다. 베네수엘라의 원유 매장량이다. 마두로 대통령은 ‘1페트로=원유 1배럴’을 제시했다. 원유 1배럴, 즉 1페트로의 가치는 59달러로 계산했다. 따라서 1억 페트로는 59억 달러(약 6조3000억원)에 해당한다. 앞으로 국제 유가가 오르내리면 페트로의 가치도 따라서 움직이겠지만 비트코인 같은 ‘대박’은 없다.
 
또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은 정부의 통제권이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수많은 컴퓨터의 집합체가 기록을 관리한다. 따라서 정부나 중앙은행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반면 페트로는 마두로 대통령의 행정 명령으로 발행이 결정됐다. 비트코인의 ‘채굴’에 해당하는 과정이 페트로에선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이뤄졌다. 추가 발행이 필요하면 역시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금융 전문가와 거리가 멀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정치인이 되기 전 경력은 버스 운전사와 노조 활동가였다. 이후 국회로 진출해 외무장관과 부통령을 지냈고,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다.
 
지난해 8월 4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시위대들이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EPA=연합뉴스]

지난해 8월 4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시위대들이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EPA=연합뉴스]

 
페트로의 탄생 배경은 베네수엘라의 살인적인 인플레다. 지난해 물가 상승률은 2616%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연초 1000원짜리 김밥 한 줄이 연말이 되자 2만6000원으로 오른 셈이다. 공식 통계가 그렇다는 얘기다. 서민들의 체감 물가 상승률은 더 심하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이 아우성을 칠 수밖에 없다.
 
베네수엘라의 외환시장은 사실상 붕괴했다. 이 나라의 화폐 단위는 볼리바르다. 공식 환율은 10볼리바르=1달러다. 하지만 암시장에선 1달러에 13만7000볼리바르에 거래된다. 공식 환율의 무려 1만3700배나 된다.
 
베네수엘라 최고액권 100만 볼리바르 지폐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베네수엘라 최고액권 100만 볼리바르 지폐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마두로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통화 가치 안정은 시급한 과제다. 실물 자산에 연동된 화폐를 도입하려는 이유다. ‘금본위제’와 비슷한 발상인데, 대상은 금이 아니라 원유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한다.
 
이런 점에서 페트로는 암호화폐보다는 과거 남미에서 주목받았던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의 새로운 유형에 가깝다. 달러라이제이션은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해 자국 통화의 가치를 달러에 연동시키는 정책이다.
 
1990년대 아르헨티나가 비슷한 정책을 시행해서 한때 효과를 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1페소=1달러의 고정 환율로 살인적인 물가를 잡는 듯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경제 위기가 닥치자 돈 많은 사람부터 자국 통화인 페소를 달러로 바꿔서 외국으로 옮겼다. 결국 1페소=1달러는 붕괴하고, 변동 환율로 돌아갔다. 결국 서민들은 살인적인 인플레로 고통을 받았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사정은 90년대 아르헨티나보다 더 나쁘다. 더구나 페트로는 종이나 동전으로 형태가 아닌 순전히 ‘장부상의 화폐’다. 베네수엘라의 열악한 정보기술(IT) 인프라 사정도 고려해야 한다. 일반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페트로를 사용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남은 것은 투자 목적의 암호화폐 보유다. 투자자들의 신뢰를 없지 못하면 ‘사막의 신기루’에 그칠 수밖에 없다. 베네수엘라 야당은 물론 외신들의 전망은 대체로 이런 쪽이다.
 
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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