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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북한 온다고 흥분해선 안 될 까닭

중앙일보 2018.01.09 01:44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제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 벨기에의 격전지 이프르. 영국군과 독일군은 100m가량 떨어진 참호 속에서 처참한 전투를 이어 갔다. 그러다 성탄 전날, 포화가 멈추자 한 독일 병사가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다. 노래를 들은 영국군도 캐럴로 화답했다. 경건한 분위기가 무르익자 양쪽 병사들은 중간지대로 기어 나와 협정을 맺는다. 25일 성탄절 하루 싸움을 멈추기로.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 휴전’이다. 성탄절이 되자 양국 병사들은 기발한 행사를 치른다. 적과의 축구시합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증오는 녹아내렸다. 정치적 갈등을 푸는 데 스포츠만 한 게 없음을 웅변하는 실화다.
 

정부, 평창올림픽 통한 북핵 해결 기대
“스포츠 위에 정치” … 대박 꿈꿔선 안 돼

이런 잠재력 덕에 스포츠는 외교 수단으로 애용돼 왔다. 1972년 미·중 국교 정상화에 불을 댕긴 것도 탁구였다. 한 해 전 일본 나고야 국제탁구대회 때 경기장행 차편을 놓친 미국 선수를 중국 선수단이 버스에 태워 준다. 무사히 도착한 그는 버스에서 내리며 “중국에 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를 전해 들은 중국 측은 바로 미 선수단을 초청했다. 미·중 간 벽을 허문 ‘핑퐁외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런 스포츠 외교가 애용됐던 대표적인 곳이 한반도다. 스포츠 순위 경쟁에 골몰했던 동·서독과 달리 남북한은 단일팀을 꾸리거나 국제경기 때 공동 입장하기 위해 무진 애썼다. 이 덕에 남북 선수단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시작으로 아홉 번이나 공동 입장한다. 단일팀을 꾸려 빼어난 성적을 거둔 것도 세 번이다. 특히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현정화-리분희 복식조가 세계 최강이라는 중국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해 진한 감동을 낳았다. 선수·코치는 물론 감시하던 양측 기관원까지 펑펑 울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건 이토록 스포츠 교류가 많았는데도 북한의 도발은 갈수록 심각해졌다는 사실이다.
 
오늘 판문점에서는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논의할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린다. 이를 계기로 공동 입장이나 단일팀 구성이 이뤄지면 한반도 전체가 환호할 게 틀림없다. 현 정부는 이런 결과를 끌어내 북핵 문제 해결의 기폭제로 삼으려는 듯하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무주 세계태권도대회에서 “평화를 만들어 온 스포츠의 힘을 믿는다”며 “평창에 북한 응원단도 참가해 남북 화해의 전기를 마련하면 좋겠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하지만 이는 사안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스포츠에는 정치 상황 자체를 바꿀 힘이 없다. 미·중 관계 정상화도 핑퐁외교가 이룬 게 아니다.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탁구가 쓰였을 뿐이다. 당시 미·중은 갈수록 강력해지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힘을 합칠 필요가 있었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만으로 한반도 안보 상황이 크게 나아질 걸로 여기면 착각 중의 착각이다. 2006년 10월은 남북이 2년 뒤의 베이징 올림픽 공동 입장을 깊숙이 논의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첫 핵실험을 감행한다. 군사적 이익을 위해서는 남한과의 스포츠 협력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니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만으로 대박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큰 기대가 스러지면 좌절도 막심하다. 아무리 단일팀이 금메달을 따도 북핵은 사라지지 않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지난해 무주 세계태권도대회에 온 장웅 북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은 단일팀 구성 가능성을 묻는 말에 싸늘하게 답했다. “스포츠 위에 정치가 있다”고. 평창올림픽에서 어떤 감동이 연출되더라도 너무 흥분해선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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