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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칼럼]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비전과 정치의 공간

중앙일보 2018.01.08 01:46 종합 31면 지면보기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1990년대 말 민주당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을 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말이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때가 있었다. 새로이 출범한 개혁 정부로서 지난날 위로부터의 권위주의 산업화와 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이 아닌, 민주주의와 병행할 수 있는 경제운영의 방향을 예시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거시적 비전은 국제금융 위기의 광풍에 휘말려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국가·대기업 유착은 모두의 폐해
대기업은 자율적이되 법의 지배를
노사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 구현을
노조는 기업 성장에도 참여하면서
협력적 노사관계로 전환해야 한다

새로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서 지금까지 드러난 경제운용의 방향은 “소득 주도 성장”이나 “혁신성장론”과 같은 말로 대표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성장과 분배, 기업정책과 노동 및 사회정책을 포함하는 경제운용을 위한 비전이나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한 방향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아니 정부 안팎에서 사회경제적 차원의 개혁에 관한 진지한 논의도 발견하기 어렵다. 촛불시위에 힘입어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개혁 정부로서 제시할 법한 경제운용에 대한 비전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다소 의외로 여겨진다.
 
박정희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든, 관치경제라고 부르든 국가-재벌 연합이 주도하는 경제운용 방식이 이른바 “눈부신 성장”과 함께 부와 소득의 불평등, 사회적 양극화, 중심적인 생산자 집단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를 포함하는 사회통합의 실패라는 결과를 가져온 지 이미 오래다. 이러한 문제들은 촛불시위와 같은 대규모 시민적 요구의 분출이 아니더라도 오랜 기간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개혁 의제로 자리 잡아 왔다.
 
필자는 이러한 환경하에서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비전과 정책 대안 구성을 위해 두 방향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경제운용에서 그동안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국가와 재벌 대기업 간의 관계가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들 간의 관계는 국가와 재벌 양자 모두에 폐해를 가져왔다. 이들 간의 동맹 또는 유착 관계를 통해 국가를 관장하는 선출된 정부는 경제영역 전반으로 그 권력을 확대하면서 부정과 비리에 취약하고 부패하기 쉬웠다. 그런가 하면 대기업 또한 스스로 거버넌스를 개선하며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기보다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쉬운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최장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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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로운 기업 환경하에서 재벌 대기업들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법의 지배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또한 공익에 기여하기 위해 전경련과 같은 대기업 결사체가 재구성돼야 할지 모른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 역시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복지와 분배, 불평등 완화와 사회 통합의 가치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경제운용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이러한 경제운용의 방향은 위로부터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집권적 성장 중심 경제에서 분산적이고 경쟁적이며 사회적으로 조율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둘째는 민주주의와 병행하는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이다. 그것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고, 노동배제적이고, 노사대립적인 관계로부터 유럽에서 ‘코포라티즘’이라고 불리는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노사정 합의·협력주의로의 전환을 말한다. 중심적인 생산자 집단인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노조를 결성하고, 그들의 고용주인 기업과 노사관계를 형성해 그들의 권익을 실현코자 하는 행위는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위한 공리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노조는 노동자들의 이익 실현에만 몰두하는 이익집단만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이 이뤄낸 사회복지 체제하에서든, 신자유주의적 경제환경하에서든 그들은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그에 따른 이윤 확대에 협력하고 불황기에도 기업과 국가 경제 성장을 위해 자기 이익 실현을 절제하는 노사정 협력 모델을 발전시킨 바 있다.
 
물론 모든 정치 이슈 가운데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내용을 변화시키는 문제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이 영역이야말로 열정과 이데올로기, 가치와 이익들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사회적, 정치적 갈등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정치의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개혁자로서 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은 정당·국회와 원활한 협상과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고 관료행정 체계의 기구와 조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정부는 민주주의에 부응하는 사회경제적 비전을 통해 이해당사자들과의 협상을 주도하며 사회적으로 수용할 만한 합의를 도출해내는 기예를 발휘하는 것만큼 의도한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 물론 이 가능성의 공간이 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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